<우연한 소비는 없다>, 다른 이야기
더러움은 옷의 숙명이다. 대부분 옷을 살 때, 옷이 지저분해지고, 낡고 구겨질 것을 떠올리며 구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종 더러움을 유발하는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은 산적한 것이 사실. 점심시간 김치찌개와 짜장면을 먹을 때. 탕수육을 앞에 두고 부먹과 찍먹을 고민하는 순간. 주말 늦은 아침에 직접 핸드 드립한 정성 가득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의 순간까지 옷은 더러워질 수많은 기회와 마주한다. (비싼 옷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어제 만난 여자 친구가, 나 달라진 거 없어?,라고 물음을 던지는 순간처럼 매 순간 긴장해야 한다. (이럴 땐 어제보다 더 곱구나, 라는 말을 준비하자)
내부 요인 또한 만만찮다. 우리의 몸은 쉬지 않고 땀과 피지, 침과 같은 분비물을 생산하고 있고, 각질과 지방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은 나만의 얘기일 수도 있다.
숙명은 현실이 되었다. 이런저런 몇 십만 가지의 옷의 지저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빨랫거리가 베란다 한쪽에 수북하다. 옷이 더러워지지 않길 바라는 것은 요원하다. 깨끗한 옷은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알기에 빨랫거리를 마주하는 일은 덤덤해져야 한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면 그러한 덧없음으로 인해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고 했다. 특히 매사 들뜬 행동으로 아무 일에나 함부로 서둘러 뛰어드는 나 같은 인물은 그러한 불행과 밀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애초에 옷이 지저분해질 것을 상정하고 옷을 구입하고 입고 생활한다.
주말이다. 빨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평일에는 샐러리맨의 일을 한답시고 바쁘게 지내는 것을 핑계 삼아 미뤄두었던 빨래를 해야 한다. 평소 한껏 멋 부리고 다니는 패션 피플도 이 순간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패션은, 의복 생활은 한순간의 이벤트가 아니라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빨래는 패션의 과정 중 일부. 패션의 완성, 마무리는 얼굴이 아니라 빨래인 셈이다. 본인이 직접 빨래를 하던지, 누군가 대신해주던지 이는 마찬가지다.
셀프 빨래방 행. 파랗고 널따란 이케아 프락타 장바구니에 빨랫거리를 한 움큼 담았다. 각종 공구와 소품을 담을 수 있는 이케아 장바구니는 빨랫거리를 담을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일주일치,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는 빨랫거리를 이고 셀프 빨래방으로 향했다. 빨래하는 시간 동안 심심함을 달래줄 책 한 권은 필수다. 책상 위 너저분하게 쌓여있던 책 한 권을 대충 챙기고 집을 나섰다.
옷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세탁기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일렬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은빛의 세탁기 앞에 있자니, 흡사 히어로가 떼거지로 나오는 영화의 우주선에 탄 기분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무언가 꽤 먼 미래로 온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동그란 금속의 동전을 세탁기에 흘려보냈다. 세탁기의 주둥이를 열고 빨랫거리를 털어 넣고 나름의 타임 워프를 준비한다. 계기판의 빨간 디지털의 숫자가 줄어들면 나의 옷들은 깨끗함을 다시 뽐낼 것을 기대하며.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면, 배가 너무 부르면 다듬이질할 때 옷감이 잘 치이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이 해먹기 쉽다는 것이고,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 <방망이 깎던 노인>, 윤오영
챙겨 왔던 책을 펼쳤다. 적당한 소음과 빨래방 안의 조금은 미지근한 인공의 공기는 독서의 집중력을 높여준다.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기다가 힐끗힐끗 빨래가 다 되었는지 확인한다. 두세 번 정도, 다 되었나, 쳐다보면 그제야 바삐 움직이던 세탁기의 되새김질이 끝나 있다. 세제와 섬유유연제에 축축이 젖었던 빨래를 건조기 주둥이에 털어 넣어야 하는 시간. 건조기의 온도와 시간을 설정하고 다시 덮어두었던 책을 펼친다.
건조가 끝났다는 알림음이 울린다. 미래에서 온듯한 기계에서 옷들을 꺼내는데 잘 마른 셔츠가 따뜻하다. 볕 좋은 날 옥상에서 바삭하게 말린 옷을 걷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미뤄놓은 숙제를 마쳤다는 뿌듯함도 기분도 있지만, 깨끗해진 옷을 만지는 기분은 꽤나 행복하다. 보송보송해진 옷을 개키고, 가지고 온 이케아 장바구니에 다시 담았다. 엉겨 붙은 빨랫거리를 장바구니에 쌓아 들고 빨래방을 왔을 때와는 달리 아기 안 듯 안전하게 양팔로 안고 집으로 향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았던 수필의 문구처럼, 요렇게 꼭 알맞은 온도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다시 옷은 더러워지는 숙명을 맞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숙명으로 인해 기분 좋은 온기를 맛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슬쩍 좋아졌다. 옷을 입는 과정에 (스스로 하는) 빨래는 필수라 생각했다. 이리 생각하니 빨래하지 않는 자, 패션 피플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애초에 패션 피플이 아니니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