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연 Dec 16. 2017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열차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






6호차 사람들




2017.08.23

그날 있었던 일들을 보통 메모장에 적어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쓴다. 쓰다 보니 8월 22일의 일기가 없다. 한 줄 정도의 간략한 그 어떠한 내용도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날은 함께 했던 티모시와 올라가 내리고 깔끔한 정장에 오랜만에 맡아보는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50대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이 4호차로 들어왔다. 정말 심각할 정도로 말 수가 없었고 하루 종일 독서를 하거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혜원이와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함을 느꼈고 덩달아 우리도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자는 패턴이 되었다. 그리고 흔적이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21살의 친구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냈기에. 찡긋.


옆 호차에 있는 친구를 보기 위해 6호차에서 왔다는 샤샤와 죠디.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복도에서 만났다.


배가 심하게 고픈 걸 보니 점심시간 인가보다. 마지막 남은 컵라면을 끓이려고 하는 찰나에 샤샤가 우리 호실로 불쑥 들어왔다.

"샤샤, 라면 먹어볼래? 도시락 컵라면이 유명하지만 이건 참깨라면이라고!"

뜨거운 물을 넣자마자 우리는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몹쓸 빨리 병은 음식 앞에서 더 도진다.
젓가락질이 서툰 샤샤는 열심히 눈으로 배우더니 컵라면을 들고는 자기 방 친구들과 나눠 먹겠다고 했다. 오께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먹는 컵라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처음 먹는 사람처럼 컵라면을 마셨다.

10분 뒤, 긴 호차를 두 번 건너 샤샤가 있는 6호차에 도착했다. 참깨라면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여기군. 갑작스레 찾아온 우리를 보며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자리를 만들어줬고 그렇게 다시 모인 우리는 카드놀이를 했다. 캐나다에서 온 6호차의 또 다른 친구 사이먼. 영어가 내리지 않는 이 땅에서 언어의 숨통이 트였고 계속되는 카드놀이에 기차는 노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공기놀이




6호차 친구들은 손톱만큼 작은 다섯 개의 공을 바닥에서 던지고 받는 게 신기한지 뚫어져라 우리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편을 나눠 10점 내기로 게임을 시작했다. 1단계, 다섯 개의 공을 바닥에 던진다 까지만 성공했다. 딱 거기까지만. 공기를 천장에 부딪힐 정도록 던지는 샤샤와 던지는 건 성공했는데 바닥에서 손이 자꾸 길을 잃어 헤매는 죠디를 보고 있자니 10점은 여름을 달리고 있는 이 열차가 가을에 닿을 때쯤 나올 것 같아 1점 내기로 점수를 바꿨다. 분명 처음 시작은 공기 5개로 시작했는데 1단계만 끝나면 침대 위에 남아 있는 공기는 3개. 이 미스터리 한 공기놀이는 결국 추억 속으로 간직하기로 하고 샤샤에게 공기 5개를 선물했다.

그러자 샤샤는 바닥에 깔려있던 배낭가방을 열어 우리에게 양말을 선물했다. 양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장화라고 하기에는 털이 너무 많고, 모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폭이 깊은. 그런 양말을 한 짝씩 손에 들고 우리 호실로 돌아왔다.    








짧은 메모




배고파 죽겠다는 나란 여자의 뒷모습


2017. 08. 24
어제 커튼을 다 내리고 잠들어서인지 일어나 보니 어둠이 우리를 무겁게 품고 있었다.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니 낮 10시. 오래 잤네. 인터넷이 좀 터지려나? 핸드폰을 켰는데 아침 8시다. 하루 사이에 시차가 또 바뀌었다.

바뀌는 시차보다 더 불규칙적인 차혜원의 코골이도, 매일 오전 9~10시에 청소기를 돌리는 것도, 자다가 열차가 정차할 때면 지폐 몇 장과 카메라를 손에 쥐고 뛰어나가는 내 몸도, 첫날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에 시끄러워 귀를 틀어막다가 이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것도, 아끼고 아껴 여러 번 우려 마신 탓에 맹물이 된 티백 차도, 씻지 못해 기름기 좔좔 흐르는 내 머리카락도. 이 모든 것들이 익숙한데 5일이 지나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것. 배고픔.

내 두 눈이 열차 밖 풍경을 느릿느릿 담아내는 걸 보니 이내 정차할 것 같아 얼른 지갑을 들고 나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나온다. 꽤 오랜 시간 정차 하나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과일도 보고, 먹고 싶었던 빵도 사고, 도시락 컵라면으로 봉지를 가득 채우고 나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2017. 08. 25
푹 자고 일어났는데 아침 7시.

왼쪽 손목에 있는 시계는 한국과 점점 멀어짐을 알려준다.



2017. 08. 26
오늘은 심지어 어제보다 더 푹 자고 일어났다. 맞은편 다쉬마가 일어나서 몇 시냐 물었다. 시계를 보고는 문을 활짝 열고 복도로 나가 밝은 빛에 다시 보았다. 새벽 4시. 계속 바뀌는 시차에 적응을 못하겠다. 같은 나라에서 다른 시간을 느낀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복도에 서 있던 이웃들은 퀭한 눈으로 아침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이 모든 짐을 정리하고 이제 열차가 아닌 땅을 밟아야 한다는 생각에 후련함 반, 아쉬움 반이다. 그 후련함이라는 건 드디어 씻는다는 사실과 지긋지긋한 도시락 라면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아쉬움 반은 저 상황을 제외하고는 나는 너무나 잘 지냈다. 사람들은 심심하고 재미없고 지루하고 몸이 쑤신다고 했지만 매일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과 짧은 기간 동안 함께 생활했던 5명의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 마주하고 공유할 수 있어 좋았다.

혜원이랑 꽃단장을 하기 위해 나름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고 옷도 갈아입었다. 일주일간 저마다 널브러져 있던 짐을 하나씩 모아서 정리를 했다. 첫날 받았던 이불과 수건을 반납하고 누워져 있던 침대를 일으켜 세웠다. 처음 열차에 탔던 그 모습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밖은 어느새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렸고 뽀송했던 우리가 바스러질 듯이 푸석해졌다는 거?


20분 뒤면 마지막 정차역인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씻을 테다. 그리고 한식당을 찾아갈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