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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짓말의 거짓말 May 29. 2023

Love or Like by 이시다 이라 외 5명

<Love or Like>

일본 문학계를 이끄는 여섯 명의 작가들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6명의 일본 작가가 쓴 6편의 단편 모음집이다. 


<허밍 라이프> by 나카무라 코우


09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예를 들면 돌을 늘어놓고 놀던 흔적을 골목길 한 구석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빌딩 옥상에 재떨이가 놓여 있는 것을 보거나, 작은 시냇가에 걸쳐 있는 판자 하나가 어떤 사람의 전용 다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거나 어느 집 현관 옆에 소복이 쌓인 소금을 발견하거나...

자신만이 알고 느끼는 아주 사소하고도 사소한 어떤 사람의 삶과 행위. 


11

나는 고양이 입장에서 고양이적으로 사고해보려 했다. 

아마도 고양이는 접시를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고,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나 여기 있어'라고. 나무 밑에 접시 있지? 마음이 내킨다면 나의 피와 살로 변할 뭐라도 하나 내려놓아도 좋다고. 아마도 그런 허락을 할 요량으로 고양이는 자신의 자랑스러운 털을 드러내 보인 것이리라.


42

오가와 씨는 평범해 보였다. 너무 멋있어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일 타입도 아니다. 그렇다고 도무지 매력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매력 있는 보통 스타일과 그렇지 않은 보통 스타일이 있다면 분명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보기 싫은 자연 파마와 폼 나는 자연 파마가 있다면 후자에 속했다.  


<바닷가> by 나카타 에이이치 


59

"선생님, 저런 천둥은 세상에 꼭 필요한 거야? 전력 낭비가 아닐까?"

"신의 설계에는 빈틈이 없어. 저런 천둥번개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야."

"정말?"

"아주 오랜 옛날에 바다에 벼락이 떨어져 생명의 원천이 마련되었대. 화학반응으로 아미노산이 생긴 거지. 그 덕분에 인류가 존재하는 거야. 이건 너한테는 좀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겠어. 자, 빨리 그 문제나 풀어 봐." 

"선생님, 아는 게 정말 많네. 가슴이 없는 반면에 뭐든 다 아는 것 같아." 

책상에 놓여 있는 수학책으로 그의 머리를 때려주었다. 


91

"그 말투로 봐서 너를 짝사랑하는 것 같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

"짝사랑? 나를? 그럴 리가. 히메코가 왜 그런 농담을 하는지 모르겠는걸?"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나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 바둑부 부원들에게 말했다든지."

"그러고 보니 한 후배한테 말을 한 것 같아. 히메코에 대해."

"그 아이야! 그 아이가 너를 좋아하고 있는 거야! 넌 왜 그런 것도 모르니?"

"그 애가 말을 자주 걸어오기는 해. 늘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그렇지만 짝사랑이란 말은 좀 심한 것 같아." 

"글쎄, 정말 그럴까?"

"어찌된 영문인지 그 애 지갑에 내 사진이 들어 있긴 하지만 그냥 우연일 거야."

"우연이 아냐. 이건 확실해. 내 말이 맞아!" 

"복도 모퉁이에서 기다렸다가 내가 나타나면 짐을 들어주기도 해. 하지만 선후배 사이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 

"둔하다!"

"원래 그 애는 나를 싫어하는 눈치였어. 내게 심술을 부린 적도 있다니까."

"그랬어?"

"내가 없는데 제멋대로 내 가방을 뒤져 사인펜을 꺼내가질 않나. 그걸로 노트에 마구 칠을 해놓고."

"정말 축하해! 그건 심술이 아냐."

중학생 때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남학생의 펜을 가방에서 꺼내 노트에 그 남학생의 이름을 썼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것이라면 잉크조차도 그녀에게는 보물이었다.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지만 그런 마음은 친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리얼 러브> by 이시다 이라 


126

"그렇지만 그 여자는 유부녀잖아."

"주임도 유부남이야."

그 말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그 사람이 기혼자인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방을 둘러보면 좋은 여자 좋은 남자는 모두 선약이 되어 있다. 가나코는 속삭이듯 말했다. 


138

"아이가 둘이라..."

(중략)

".....그렇다면 적어도 두 번은 섹스를 했다는 말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백발백중 섹스가 이 세상에 어디있어. 수도 없이 했을 거야."

가나코의 손바닥이 다시 야스의 등에 떨어졌다. 

"알고 있어. 그냥 해본 소리야."

야스는 입을 다물었다. 가나코는 밤의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진을 정찰해본다는 생각이었는데 부인의 배를 보고는 맥이 빠지고 말았어. 나보다 몸집도 한참 작고... 주임은 그렇게 작고 귀여운 사람이 좋은가 봐. 그런 생각을 하니 그냥 기운이 빠지네."

할 말이 없었다. 야스는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따라 걸을 뿐이었다. 

"세상이 거대한 사기극을 벌이는 것 같아." 


<DEAR> by 혼다 다카요시


162

"이거."

그녀는 비닐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우리 엄마가 전해주고 오라고 해서."

나는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봉지 안에는 딸기가 들어 있었다.

"친척이 많이 보내줬거든. 그래서 나눈 거야." 

"아, 응. 고마워."

어머니가 가져다주라고 하셨다면 그 어머니는 집에 계실 것이다. 나는 딸기 봉지를 들고 나가려는 어머니를 제지하고 자신이 가지고 가겠다고 말하는 그녀를 상상해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건 보통 어머니가 가져다주시는 게 맞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166

학교에서는 우리 네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초등학교라는 왕국에는 '남자'와 '여자'라는 엄격한 영토가 있었다. 그 왕국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죄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좋은 소리를 들을 일도 아니었다. 


213

친애하는 사람에게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친애하는,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DEAR, 영어로는 그렇게 되겠지. 그냥 친한 것만이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것만도 아니고 더 가까이 나와 네가 존재하는 느낌. 종이의 표면과 뒷면처럼 둘이서 하나가 되는 느낌. 난 네가 좋아. 정말 좋아해. 한 장의 편지처럼 꼭 달라붙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늘 같이 있고 싶어. 학교에도 가지 않고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그냥 너랑 둘만의 장소에서 꼭 붙어서 살고 싶어. 


214

"왜 그녀는 본명으로 그렇게 할까 하고. 그런 거, 보통 이름을 바꾸잖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거: AV 배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런 일을 할 때 본명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 같은 걸 보내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봤어."

잘은 모르겠지만, 하고 구로사키는 웃었다. 그 웃음을 받아 후나기도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들의 첫사랑 여인은 멋지게 자라서 돈을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들과 섹스를 하고 있으니 쓸데없는 환상은 버리라고." 

"그런 게 아냐." 

구로사키는 진지하게 말하더니, 풋 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지도 몰라. 모두 잘 지내니? 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어, 하는 그런 느낌 말이야." 


<갈림길> by 마부세 슈조 


224

5~6미터 앞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내 가슴은 무거워졌다. 솔직히 말해 이런 기분은 정말 싫었다. 그녀와 스쳐 지나 가는 동안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기분이 든다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정면에서 다가온다. 그녀의 얼굴을 본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상처를 받는다. 두근거리는 가슴이란 놈은 그냥 눌러두어야 한다. 앞으로 2년 가까이 신가와 유키에를 만날 때마다 상처를 받는다면 나는 심한 겁쟁이가 되어 졸업을 맞게 될 것이다. 

복도 끝에서 그녀가 다가오고 있고 도중에 모퉁이도, 뻥 뚫린 구멍도 없다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자기혐오감에 시달리면서 앞을 똑바로 보며 걸어갔다. 

신가와 유키에도 나를 보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면, 나는 바보 같은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38

나는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땅바닥을. 그 땅이 교무실과도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양이 이마> by 야마모토 유키히사 


287

어느새 사야카가 옆에 와 섰다. 

"과거가 어떻든 지금의 점장이 나는 참 좋아요. 존경해요. 평생 따라다니고 싶어요."

"평생 따라다녀서 어떡하려고?"

마유코가 그렇게 말하자 사야카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혹시 저런 표정이 귀엽게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런 표정은 나에게 보일 게 아닌데. 


<옮긴이의 말> by 양억관


290

그 소녀를 세 소년이 사랑하게 된다. 소년들은 소녀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었다. 소년들은 소녀에게 한 사람만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중략)

스무 살이 된 그 해,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들은 연못 속에서 편지를 꺼내어 읽어본다. 결국 소녀가 누구 하나를 선택할 수 없어 모두를 선택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중략)

본명으로 당당하게 에로 배우로 활동하는 그 소녀가 왜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짐작할 따름이다. 열두 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주술적 올가미가 되어 그녀의 삶을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으리란 것을... 그 삶의 스타일을 그 소녀가 스스로 선택했다면 결코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소년들은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좋아하는 소녀의 사랑을 저 혼자만 받고 싶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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