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첫 연애-7화

찌질한 상상

by 거짓말의 거짓말

이상했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 나는 세상의 중심이 바뀌는 줄로만 알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중요할 그 사람을 중심으로 나도, 세상도 돌아가는 건 줄 알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 사람이 사람을 혼자서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 일방통행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내 모든 신경이 그 사람의 시공간으로 향하는 것.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그 사람의 부재로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 내 몸과 마음의 등기부에 오직 그 사람의 이름만을 적어두는 것. 적어도 내게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차마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더라도,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어떻게 변하는지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개똥 같은 고집이었지만 그래서 나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먼저 말하지 않기로 정했다. 설령 살이 되고 피가 될지라도 주변의 충고나 조언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그 사람에게 그 사실을,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해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여자 친구가 생겼지만 쉽사리 그에게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자 친구의 머릿결이 바뀌거나 손톱 색깔이 바뀌면 '예쁘다'란 칭찬을 할 수는 있게 됐지만, 정작 '네가 좋아'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라운드의 타석에 서기만 하면 1루, 2루, 3루를 쏜살같이 지나 홈 매트를 밟고 싶을 줄 알았는데 진도를 빼고 싶다는 의욕도 별로 생기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이상하게도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 동료들과 등산을 가기 위해 주말 중에 하루를 썼다. 아침에 눈을 뜨면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하다 알람을 끄는 것과 동시에 사랑이 듬뿍 담긴 문자를 보내는 일도 별로 없었다. 매일 아침 평소처럼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하고, 넥타이를 매고 출근 준비를 했다. 사람에 부대끼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쪼개서 '의식적으로' 아침 문자를 보냈다.


둘이 만나면 쉼 없이 얘기했지만 정작 내가 A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게 의식적이었던 것인지 무의식적이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또 나 역시 A가 나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아마 서로 말은 안 했지만 그런 류의 미지근한 무관심은 누구보다 당사자인 서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A와 나는 일상의 작은 부분들을, 약속이 없는 평일 저녁과 주말 중 하루를 같이 보냈다. 주말 이틀을 모두 같이 보내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게 일주, 이주, 삼주, 그리고 사주 차에 접어들었다.


2월 중순에서 말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날은 구정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다. A와 나는 모두 이번 설에는 시골에 내려가지 않았고 그 전날 만나서 데이트도 했다. 그리고 그날은 집에서 각자 쉬면서 명절 음식을 먹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명절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살 찌겠어." A는 내게 이런 일상적인 얘기를 했다. 전혀 이상한 조짐은 없었다. 그리고 연휴 마지막 날이 지난 새벽 1시 혹은 2시경. A에게 장문의 문자가 왔다.


글자는 핸드폰 한 화면, 혹은 두 화면을 가득 차고도 넘쳤지만 결국은 "그만 만나자, 헤어지자"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