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상상
이름 있는 여자와는 잘 수 없었다. 내가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무책임한 말이지만 그건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름이 있다'라는 건 상대와 내가 인간적인 관계를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대화를 나누고, 밥 혹은 커피를 같이 먹고, 선·후배나 동료라는 이름으로 규정을 지을 수 있는 틀 안에 들어가는 것 말이다. 그들과 나는 과거를 공유했고, 현재를 함께했으며, 나아가 미래가 있을 것이었다.
'잘 수 없었다'라는 건 굳이 영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캔트(can't)'와 '원트(won't)' 모두를 의미했다. 쉽게 말해 여자 친구, 혹은 애인과는 한 번도 자지 못했다(않았다).
전자는 능력 혹은 상황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뜻이고, 후자는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상황이 돼도 그럴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이름이 있다'라는 전제하에서는 말이다.
이름 있는 여자와는 함께 잘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었다. 필연적으로 이름 있는 여자와 잘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캔트(can't)의 영역이었다.
동일한 사람이라도 이름을 갖기 전에는 자고 싶다가도 그녀가 이름을 갖는 순간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지하철, 강의실, 길거리 등에서 마주치는 낯선 여자, 심지어 노출이 심한 사진을 SNS에 올리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들과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이름을 갖게 되면 눈이 녹는 것처럼 자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원트(won't)의 영역이었다.
하나의 '비유'로서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학생 시절 개강 첫날 들어 간 교양 수업에서 우연히 눈에 띄는 예쁜 여자애를 발견하고 그다음에 자위행위를 할 때 그 애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후 그 애와 수업을 같이 들으며 이야기를 하게 되고, 같이 밥을 먹고, 술을 한 잔 하게 되면 그런 생각이 다시는 들지 않았다.
익명의 그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검은 실루엣에 불과했던 그녀가 몇몇 조각들을 채우고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이 돼 내 앞에 존재하면 나는 그들에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그녀를 만질 수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미도리 같은 귀여운 여자애가 "나를 생각하면서 자위를 해줘"라고 부탁해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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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그녀들과는 우연한 계기로 매우 드물게 함께 자는 일이 있었다. 아주 가끔 누군가의 체온이 견딜 수 없이 그리울 때면 내가 이름 없는 그녀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관계성을 배제한 이름 없는 그녀들과의 행위 이후 후회를 하거나 허무를 느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익명의 그녀들과의 잠자리는 편안했고, 때로 따뜻했다. 솔직하게 그 상황과 감각에만 집중하면 됐다. 그들과는 과거도 없었고, 미래도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재만 있는 그녀들과의 관계는 그래서 더 진짜였고 더 충실했다. 관계가 끝난 후에 "좋았어?"라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묻지 않아도 관계 중에 상대가 욕과 함께 그 말에 대한 답을 내뱉는 경우는 가끔 있었지만.
익명의 그녀들은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거나, 심리적인 방어선에 관대해질 만큼 술에 취해 있거나, 때로 직업여성이기도 했다.
짧게는 한두 시간, 길어봐야 하룻밤에 불과한 일회성 만남이었지만 그녀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나에 대해 비슷한 품평을 했다. 관계가 끝나고 나서 그들은 내게 친절하다(kind) 거나 다정하다(nice, sweet), 혹은 착하다(good boy)는 뉘앙스의 말을 건넸다. (물론 관계 중에는 '크다(big)'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 직업여성의 경우야 그런 립서비스가 이해가 됐지만, 여행지에서 스치는 인연, 혹은 나와는 국적이 다른 그녀들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적잖이 놀랐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타국의 호텔에서 몇 차례에 걸쳐 사랑을 나눈 뒤에 익명의 그녀가 물었다. 시간은 새벽 4시쯤. 그녀는 내게 택시를 타고 돌아갈 건데 자기를 배웅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영어였지만 그 질문에는 상대방의 거절을 염두에 두고 어려운 부탁을 청하는 것 같은 인상이 비쳤다. 일말의 고민 없이 나는 그녀와 함께 내려가 택시를 잡아줬다. 반바지 차림에 호텔 슬리퍼를 신은 채였다. 그리고 또다시 연락할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방으로 올라가 조심히 들어가라(take care)고 문자를 남겼다.
그녀를 보내고 나서야 관계 후에 그냥 곯아떨어져 버린 남자들로 인해 그녀가 서운함을 느끼거나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런 행동(생각)들 때문에 친절하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 같다,라고 지금은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그녀들을 배려한 행동이었다기보다 특별한 고민 없이 이뤄지는 일종의 조건 반사였다.
나는 그러니까 나 자신을 위해 어떤 행동 패턴이나 규율 같은 것을 내재화해 반복하는 것에 익숙했다. 가령 내 주변의 지인, 이름이 있는 사람의 생일에는 선물을 사서 건넸다. 하지만 선물을 건네며 그들이 그 선물을 받고 기뻐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단지 다른 누군가의 생일에는 선물을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었다. 반대로 타인에게 선물을 받아도 크게 기쁘다는 느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