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상상
한 번도 타인을 앞에 두고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차고 넘쳐서 '의미 없는 말이 되었지만 사랑해요'라고 노래한 가수도 있었지만, 내게 그 말은 너무 무겁고, 또 어려웠다. 내 입술과 혀는 '사'와 '랑'이라는 음절 각각을 소리로 만들 수는 있었지만 두 음절을 합친 한 낱말은 소리로 만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 사전에 사랑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말은 다른 어떤 단어보다 가장 크고 진한 글씨체로 내 사전의 한 페이지를 차지했다. 하지만 나는 그 페이지를 찢고, 구겨서, 아무도 모르게 내 주머니 속에 넣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고민해봤다. 나는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걸까. 왜 다른 사람들처럼 주변에 있는 나쁘지 않은 상대와 적당히 사귀고 만나면서 사랑놀이를 할 수 없을까. 오늘 처음 본 여자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잘 수 있으면서 왜 30년 만에 처음 사귄 여자 친구와는 키스하는 것도 주저할까.
여자를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왜 여자를 그렇게나 증오할까.
내 탓이었다.
나 자신이 하나의 병균처럼 느껴졌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면 상대는 감염될지도 모른다. 나와 무관하거나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상관없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스스로를 짓눌렀다.
호감이 가는 상대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신체적인 접촉을 피했다. 상대에 대한 호감,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이 생길 것 같으면 나는 그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상대에게 다가가는 대신 거리를 뒀다.
과도한 감정의 절제는 부작용을 동반했다. 스스로 아무리 최면을 걸어도 왼쪽 가슴에 있는 붉은 덩어리는 회색 강철로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때때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격렬하게 요동쳤고 뜨거워졌다. 하지만 내 심장의 격렬한 떨림을 차마 상대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균형이 필요했다. 안으로부터 무언가가 터져 나왔고, 그걸 받아 줄 사람이 내게도 필요했다.
익명의 그녀들은, 나와 무관하거나 적대관계에 있었고, 나는 그녀들과 가끔 잤다.
이름 없는 그녀들에게 내가 상처를 줄 일은 없을 것이었다. 설혹 그녀들이 나로 인해 상처받더라도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리고 익명의 '그녀들'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그녀'와 같은 여자였기에 어쩌면 나와 적대 관계에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를 원했지만 그녀를 가질 수 없었으므로 그녀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복수를 해야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 만질 수도 없다. 그리고 살과 살이 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의 매력은 유한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에 대한 감정도 아주 천천히 식어갔다. 그럼 나는 다시 미지근해진 감정의 찌꺼기를 들고 이름 없는 그녀들을 만나러 갔다.
언젠가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일반적인 남녀의 만남과 다른 순서로 시작되는 관계를 다룬 내용의 소설을. 고백, 감정의 확인, 키스, 섹스는 진부하다. 정점을 찍고 하락을 향해 달리는 권태만큼 지루한 게 있을까. 마음의 진동이 사그라드는 걸 지켜보는 일은 서로에게 나쁜 기억만 남길뿐이다.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인 두 남녀가 첫 만남에 같이 섹스를 한다. 감정 없는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시작된 둘의 관계는 그때부터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된다. 둘은 그 날 이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받아 든다. 손을 잡고, 키스를 할 때, 첫 날밤(섹스)의 그날보다 더 큰 진동이 온다. 마침내 둘은 만난 지 69일째 되는 날에 흥분과 환희로 가득 찬 완벽한 두 번째 섹스를 하고, 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