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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Jun 19. 2022

[책] 김영하 - 작별 인사

밤하늘을 보며 준비해야 할 인류의 마지막 인사

김영하 작가님의 <작별 인사>를 읽었다. 인류가 멸종한다면 이 책을 인류의 '작별 인사'로 남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도태되어 가는 '종으로서의 인간'

인간들은 번거로운 번식의 충동과 압력에서 해방되어 일종의 환각 상태, 가상세계에서 살아갔다. 오래전 중국의 도가에서 꿈꾸었던 삶이 인간에게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멸종해버렸다.

인간을 '종'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요소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멸종하는 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지 모르겠다.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는 것은 약해서가 아니다. 그가 말년에 기계들을 적대시했던 것은 그저 본능일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도태되어가는 종의 일원으로서 나름 최선을 다해 저항했던 것이다.

우리가 발전하는 인공지능에 대해 갖는 실체 없는 두려움은 생존 본능에서 나타난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호기심과 욕망, 신념을 가지고 다른 세계를 탐험하고 그들과 교류하려 할 거야. 감정이 있는 존재만이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래야 그 결정들을 바탕으로 발전을 할 수가 있는 거야."
(중략) 그의 예측은 보기 좋게 틀렸다. 기계는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도 흡수했다.

기술의 발전과 인류의 미래를 생각할 때, 많은 창작물에서 나타나는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은 이미 클리셰가 된 지 오래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에 대한 희망을 대부분 놓지 않는 것도 클리셰였다. 하지만 <작별 인사>에서는 그 희망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인간을 가장 우월한 종으로 만들었던 요소 또한 결국은 기계가 흡수하게 될 것이라는.


#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에 대한 고민

나는 작가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인류가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이런 의문들을 품어왔다는 것을 고전 SF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기술의 발전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인간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게 한다.

막상 몸이 사라지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정신'인가? 육신이 사라지고 정신만이 남은 존재는 무엇인가?<작별 인사>의 주인공 철이는 이러한 인간의 고민을 경험하게 되는 휴머노이드 캐릭터다.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가 인간과 인류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이야기기에, 소설은 끝까지 흥미움을 잃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손을 베서 피를 흘리며 아파할 때, 평소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한 휴머노이드가 '저런, 너무 아프시겠어요'라고 말한다면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질 테니, 그러지 않으려면 그 휴머노이드도 손을 베었을 때 똑같이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략)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나 같은 휴머노이드가 만약 육신도 없이 수정 공 같은 장치 안에서 영생한다면? 그 영생은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신체의 일부를 잃은 환자가 느끼는 환지통, 있지도 않은 다리가 아프거나 가렵다고 느끼는, 이 미쳐버릴 것 같은 기이한 통증에 대해 인류는 20세기 이후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작가는 말한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기계가 갖게 된다면 그 고통은 유한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다운 기계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윤리적인 고민을 할 때가 된 것이다. 기계에게 인간다움을 부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무리 발전한 기계라도 인간처럼 존엄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최 박사에게 뇌를 백업하고 영생하지 않겠느냐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미 많은 인간이 그렇게 하고 있을 때였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중략)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을 직시하는 데에서 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점점 좁혀지고 있다. 현재도 인간은 기계의 일부로서 인생의 많은 것을 기계에 의존하고 있다. 미래에는 뇌를 백업하고 영생하는 것처럼, 인간이 오히려 '기계성'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다. 소설에 기계가 '인간성'을 선택할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소설의 주인공인 '철이'는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철이는 누구보다 인간다운 휴머노이드였다. 태생은 기계였지만 '인간성'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제 생각은 달라요. 이 우주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정말 정말 드물어요.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철이인간의 '육신'과 '죽음' 실제로 느끼고 고민했으며, 결국 기계논리가 아닌 '감정결정'내리면서 인간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 이기심인가 생존 본능인가

'이타심으로 아이를 갖는 부모는 없다'는 소설의 문제의식 공감한다. 래에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고민이기도 하다. 어떤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말했다가, '그러면 너는 너를 낳아준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냐'는 말을 들었다.

긴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이타심으로 아이를 갖는 부모는 없지만 그것을 이기심이라고 특정 지을 수는 없다. 필멸의 삶을 사는 인간에게 아이를 갖는 것은 생존 본능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죽음은 쉽게 오지도 않고, 고통은 끝도 없어. 인간에게는 인권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게 있어서 그냥 죽어지지가 않아."

고도로 발전한 인류는 점점 더 죽기 힘들어질 것이다. 생존 본능 이상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에게 원치 않은 생명 연장을 가하는 것은 오히려 폭력이고 악이 아닐까?


특히, 소설 속 이야기 전개에서는 소극적 안락사와 인공 지능의 문제를 결합시켜 한 차원 더 복잡해진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이미 생명을 다한 것이 분명하지만,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살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다시 살려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신체의 일부는 새로운 기계로 대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살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살아 있을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려낼 수 있다면, 살리는 것이 옳은 일인가?


미국 의학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인간다움을 만드는 뇌의 일부가 잘못된 상태임에도 환자의 생명을 살려낸 의사가 있었다. 그를 그답게 만들던 부분을 상실한 채 살아난 환자의 모습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생존이 가장 우선적인 본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생존 본능이란 모든 상황에서 최우선 가치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중국인들은 낮의 하늘이 아니라 밤의 하늘이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낮의 하늘은 자꾸만 변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던 거야."

'밤의 하늘'은 문명의 '본질', '낮의 하늘'은 '기술'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하는 기술 속에서 인간은 결국 본질을 잊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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