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해야 한다는 슬픔

by 밈혜윤

나의 구원은

가끔 영원한 작별에 대해 생각해. 아니 종종.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 궁금하고 내 장례식장엔 몇 개의 화환이 늘어서게 될지도 궁금해져. 내 친구들은 어떤 울음을 흘리게 될까? 울음에도 강도가 있어. 슬픔을 슬픔이라고 차마 부르지 못할 만큼 경추를 탁 치는 처절함도, 내가 슬픈지 아닌지 생각이 엇갈리는 조용한 눈물도, 우리는 모두 울음이라고 부르니까. 친구들이 너무 처절하게 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웃으면 더 좋을 듯해.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한 날이 있었다. 숱하게 말했듯 내가 나를 살해할 용기는 없었으나 살아갈 용기도 없는 날들이 분명 있었다. 미래가 기대되지 않았고 포기하고 싶었다. 엄마아빠는 왜 나를 낳아서 이런 고통 속에 처박은 거야, 하고 온당치 못한 분노와 원망을 품었다. 버려진 흉가 중에서도 가장 끄트머리 음지에 자리 잡아 지력조차 자기를 포기하길 기다리는 민들레처럼, 조용히 시들기를 바랐다. 그때 내가 인생에서 소망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뿐이었다.


희한하지. 삶을 포기하고 싶었는데도 내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이 눈물 흘릴 생각을 하면 그렇게 눈물이 쏟아졌어. 분명 우리 엄마는 내 친구들보다 더 처절하고 아픈 울음을 토할 텐데, 엄마가 우는 상상보다 친구들의 울음이 더 나를 울게 했었어. 그렇게 울다가 밤을 꼴딱 새기도 했고 정신없이 탈진해서 잠들기도 했었어. 엄마보다 친구들을 사랑한다기보다는, 내가 기대할 수 있게 만든 쪽은 친구들이었기 때문 같아.


삶이 뭐라고 생각해? 나는, 삶=미래인 것 같아. 미래를 기대하거나 생각할 수 있다면, 미래를 감히 준비하려 든다면. 그 모든 과정이 삶으로 통칭되는 거지. 내 미래, 내 삶엔 항상 친구들 얼굴이 몽실몽실 피어 올라. 내가 빈 담뱃갑처럼 구겨서 버리려던 내 미래를 먼저 이야기하던 것도, 듣는 내가 솔깃해서 덩달아 내 미래를 억지로 상상해 보려고 했던 이유도, 모두 친구들이었어. 나의 구원은 너희들이었어.


사랑해야 한다는 슬픔

I는 내 책의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고 말했다. 혜윤, 너는 친구들을 생각하고 쓰면서 그 틈의 빛으로 살았구나. D는 말했다. 혜윤, 너는 친구들을 정말 좋아하나 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댓글을 달기도 DM을 보내기도 했다. 당신의 친구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자신의 친구를 생각했다고, 혹은 자신이 어떤 친구일지 생각했다고. 그조차 나의 구원이었습니다.


정박할 뭍을 찾아 헤매는 것만 같던 20대의 기나긴 모험기는 아주 바람직하게도, 내가 언제나 뭍에 가까운 곳에서 첨벙 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끝났다. 그보다 바람직한 이야기를 하나 더 얹자면 나 또한 그들에게 뭍이었으리란 사실이다. 다음 주엔 책 인쇄본을 퀵으로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돌돌돌- 닻줄을 감는 기분이 든다.


어릴 때는 부끄럽게도 내가 더 사랑할까 봐 겁이 났다. 나보다 더 큰 마음으로 나를 아껴주길 바랐다. 어떤 사람을 견딜 수 없이 좋아하는 것 같으면 왠지 서글펐다. 여전히 사랑은 나를 서글프게 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상의 마음을 받지 못할까 봐? 아니. 내가 더 깊고 커다란 뭍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거둘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서.


가족들을, 친구들을, 지나간 연인들을 사랑하면서 나는 허물이 터지는 고통을 느끼곤 했고 불쑥 허물을 벗어던지며 커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다음엔 언제나 또 다른 허물이 나를 옥죄었다. 인생이 이렇게 허물에 갇히고 벗고 갇히고 벗고 또 갇히고의 반복일까? 마음에 비해 허술한 나의 품을 항상 탓하면서 살아야 하는? 아마 그렇겠지.


지금 곁에 남은 사람들 몫의 사랑은 내가 어쩔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앞으로도 부끄러움을 견디며 사랑해야 할 것이다. 부끄러울 것이다, 많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주 많이. 슬플 것이다, 아주아주 많이.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들 덕분에 내 삶은 구원받을 것이다. 미래를 몹시 바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년 만에 수면제와 작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