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아래, 강이 낮게 흐르는 곳

포르투/포르투갈

by 혜솔

도루 강가에서


동루이스 1세 다리 아래로 살구빛이 내려앉고 있다

그 빛을 받아내며 기억의 안쪽까지 출렁인다

짐을 꾸리던 새벽의 설렘도 이런 색이었으리라

풀었다 다시 조이는 가방 끈마다 발갛게 달아오른

기대가 맺혀 있었다


강변을 오가는 무수한 발길들

어느 먼 곳에서 저마다의 진심을 들고 흘러 온 것일까

낯선 이의 멈춰 선 뒷모습에서 익숙한 온기가 느껴지는 저녁

서성이는 그림자들이 서로 겹칠 때

말하지 않아도 흐르는 정이 있다


낯선 언어들은 빗물처럼 바닥에 고인다

운명이라는 낮은 저음이 발목을 붙잡는 강가

여행자라는 이름으로 모여든 마음들이

도루강의 살구빛 물결 위로 찰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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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의 아침은 창밖의 여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멀리 검붉은 물결이 하늘을 드리우고 갈매기가 비행을 한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른 아침의 소소한 행복이다. 창을 열고 10분 정도 지났을까 붉은 물을 차고 오르는 뜨거운 그것, 낯선 도시에서 바라보는 일출의 풍경은 의외로 달콤하다. 포르투, 도루강의 일출은 달콤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리 위를 걷기 시작했다. 동루이스 1세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지붕과 계단과 골목의 사정이, 강물 쪽으로 한꺼번에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가. 나는 난간 가까이 서서, 물과 집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 화면 안에서 동시에 흔들리는 것을 한동안 바라봤다.


다리에서 내려오면 골목이 시작된다. 포르투의 골목은 넓히기보다 접어 두는 쪽을 선택한 길들이다. 빛은 벽의 모서리에 걸렸다가 조금 늦게 따라온다. 그 늦음 덕분에 내 속도도 자연스럽게 늦춘다. 빨리 움직일수록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천천히 스며드는 쪽을 택한다.


다시 보는 아줄레주, 리스본과 포르투


발길은 다시 상벤투 역으로 향하고 하늘은 봄날답게 햇살이 좋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역사를 한 바퀴 돌았다. 푸름이 어제보다 요란하지 않았다. 사람도 많지 않았다.

상벤투 역을 나오자, 푸른 타일의 기억이 아직 눈 안쪽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포르투는 그 푸름을 역 안에만 두지 않았다. 몇 걸음 더 옮기면, 거리의 모서리에서 또 한 번 아줄레주가 몸을 드러낸다.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푸른 벽면 앞에 서있곤 한다.


리스본의 아줄레주가 빛에 섞여 가볍게 흩어진다면, 포르투의 아줄레주는 벽에 붙어 시간을 묵직하게 남긴다.

리스본에서는 길을 따라 걷고, 포르투에서는 벽 앞에 서게 된다. 리스본은 칼사다(돌바닥)처럼 아줄레주도 종종 길 위의 생활과 맞닿아 보일 때가 있다. 포르투는 올려다보는 도시답게 벽면에서 강한 서사를 만든다. 리스본의 푸름은 지나가고, 포르투의 푸름은 남는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 ‘남는 쪽’ 앞에서 자꾸 걸음을 늦춘다.


얼마쯤 걷다 보니 볼량시장(Mercado do Bolhão)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금 더 천천히 걸어 보았다. 작은 성당 하나가 온 벽을 파란 장면들로 감싸 안고 서 있는 그곳까지. 창문과 돌기둥 사이로 사람들의 하루가 지나가고, 타일 속의 성인들은 그 하루를 오래 바라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속도를 낮추고, 벽을 읽듯 그 앞에 섰다. 포르투의 푸름은 장식이 아니라 기록이라는 생각이, 또다시 선명해졌다. 상벤투의 아줄레주가 ‘벽 안의 시간’이라면, 알마스 성당의 아줄레주는 ‘거리 위의 시간’처럼 보인다.

이 거리의 이름이 산타 카타리나거리였던 걸 생각해 보니 성 프란치스코(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성녀 카타리나의 장면들이 타일에 그려져 있다는 내용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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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벤투와 알마스 성당


렐루 서점과 『어린 왕자』


도우루 강 쪽으로 방향을 틀고 걷기 시작했다. 오후엔 그쪽이 내가 머물기에 좋을 듯했다. 아껴두었던 강변으로 향하는 길. 잠시 들른 곳은 서점이었다. 입장료를 받는 서점이라니...

서점엔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물론 요즘에 비하면 혼잡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정도였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 작은 북적임도 낯설었다. ‘조앤 롤링의 도시’라는 말이 이미 공기처럼 돌고 있었고, 그 공기가 사람들을 한 곳으로 데려가고 있는 듯했다. 사실이든 오해든, 어떤 소문은 장소를 더 빨리 유명하게 만든다.

나는 그곳에서 『어린 왕자』 한 권을 샀다. 여행지에서 사는 책은 늘 같다. 돌아오는 길에 읽기보다, 돌아온 뒤에 다시 펼치게 되는 책. 이 에피소드는 예전에 브런치북 『목요일 오후의 메라키』를 연재할 때 올린기억이 있다.


강변에서 가이아를 바라보며


포르투의 길들은 마치 오래된 악보처럼, 돌포장 위를 걷는 발자국 소리가 곧 선율처럼 흘러간다.

도우루 강변의 빛은 낮에도 여운을 남기고, 가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물결은 은빛으로 부서진다.

좁은 골목과 계단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한숨처럼 낮고 온화하게 도시의 모든 기억을 끌어안는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면서도 또렷하게 마음속에 새겨져, 오래된 성당의 그림자와 포르투 와인의 짙은 향기가 하나로 섞인다. 도우루는 강폭이 넓지 않아 남쪽과 북쪽이 이웃처럼 가깝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사와 현재가 조용히 무게를 나누며, 나 스스로의 발걸음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지점이다.


강변에서 잠시 멈춰 섰다. 도우루는 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물빛이 다르고, 바람의 온도가 다르고, 말소리가 물 위에서 부서지는 방식도 다르다. 난간에 손을 얹고 그때마다 달라지는 강의 표정을 오래 본다. 그러다 문득, 그 표정과 닮은 음악이 떠오른다.

내 귀에 남아 있던 노래는 〈Dia de Folga>, ‘쉬는 날’이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대신 낮은 온도로 다가왔다. 무언가를 성취하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아니라, 잠깐 내려놓는 법을 알려주는 노래. 햇빛이 골목을 스치고, 소음이 잠시 멈추고, 사람들의 얼굴이 한 톤 부드러워지는 순간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하루가 쉬는 날이 될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 나는 그 노래를 찾아 들으며 강변을 걷는다. 강이 물이 아니라 방향처럼 느껴진다. 흘러가는 것들, 그러나 흘러간다고 끝나지 않는 것들.


리베리아 광장, 버스킹


버스킹이 무르익던 시간, 나는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 하나를 들고 리베이라 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다리가 소리를 되돌려 주고 강물이 소리를 운반한다. 노래는 흩어지지 않고 잠깐 머문다. 들리는 음악이 꼭 파두만은 아니다. 포르투갈 기타의 짧은 선율이 지나가고, 가벼운 노래가 흥얼거려지고, 낯선 언어의 후렴이 바람에 실려 멀어진다. 가사를 다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다. 알아듣지 못하는 순간에도 도시는 음과 숨으로 충분히 전해지니까.

골목으로 들어가면 바람은 더 얇아진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작아지고, 발소리는 돌바닥에 가볍게 부딪혀 흩어진다. 그때부터 음악은 ‘공연’이 아니라 ‘생활’이 된다. 한 곡이 끝나면 또 한 곡이 시작되고, 그 사이로 사람들의 하루가 지나간다. 오래 서 있지 않는다. 잠깐씩 멈추었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스며드는 것들은 대개 붙잡을 때가 아니라 놓아둘 때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노래가 중심에 놓이면 풍경도 달라진다. 동루이스 1세 다리는 단지 아름다운 구조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둑을 조용히 붙들어 주는 버팀의 모양이 된다. 견디는 사람의 등뼈처럼. 강 건너 가이아의 지붕들이 층층이 누운 풍경은 ‘오래 익는 시간’을 말하지만, 나는 아직 그 시간을 꺼내지 않는다. 오늘은 와인을 말하지 않기로 한다. 이 도시에 깔린 노래의 낮은 온도를 따라가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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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루 강변의 빛이 조금씩 기울었다. 내 눈에만 걸리는 것들이 있다. 누구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풍경인데, 나에게는 잠깐 따뜻하게 남는 것들. 나는 그 따뜻함을 다른 말로 바꾸지 않았다.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오늘의 파두:Dia de Folga- 쉬는 날

https://youtu.be/jMHoNaErHT8?si=g14O1-H9gPkGHl11

Ana Moura <Dia de Folga>

나는 어디에서 걷기 시작했고,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지, 그리고 길 잃음이 준 자유를 잠시 생각했어요. 생각해 보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에 길을 잃은건 아니었다는걸 깨달았죠. 그러니 아무 일도 없어서 좋은 오후였답니다. 강변에서 어느 골목길로 들어설때 이 노래가 들렸어요. 소음이 낮아지고 마음이 스르르 풀리더라구요. 제목이 '쉬는 날'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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