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발 포르투행 열차를 타고

리스본에서 포르투/포르투갈

by 혜솔

푸른 침묵


이만 장의 시간이 벽에 붙어 있다 뜨거운 가마를 견디고 나온, 차갑게 식은 안료의 문장들

누군가의 승전보와 어느 계절의 수확과 이름 없는 이들의 기도가 푸른빛 아래 박제되어 있다

기차의 굉음이 역사를 메워도 타일 속 풍경은 흔들리지 않는다 구워진 침묵은 견고하다

그 어떤 소음도 투과시키지 못한 채 제 몸속으로 깊게 함몰시킨다

박수를 치던 손등 위로 말을 걸려던 입술 위로 오래전 멈춰버린 푸른 습기가 서린다

역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 뒤로 남겨진 풍경만이 홀로 깊다 이곳에선 소리보다

색채가 먼저 말을 걸고 마침내 남는 것은 귓속까지 푸르게 물들이는 정지된

시간의 무게


리스본을 떠나기 전, 나는 도시의 서쪽 끝을 한 번 더 밟았다. 테주 강이 가장 넓어지는 자리, 바다가 되기 직전의 물가. 예로니모 수도원의 돌은 기도의 시작을 말하기보다, 항해를 앞둔 인간의 무릎을 떠올리게 했다. 돌아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나기 위해 필요했을 기도. 벨렝 탑 앞에서 강은 이미 바다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지금 남은 것은 출발의 흔적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리스본의 바닥을 오래 바라보았다. 검은 돌과 흰 돌을 하나씩 맞물려 길을 만드는 칼사다 포르투게자. 제국보다 오래 남는 것은, 이런 노동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짜인 길을 걷는 오후가 그리워질 것만 같다.

리스본은 내게 머무는 도시가 아니라 떠나는 도시였다. 나는 이곳을 여러 번 떠났고, 또 여러 번 돌아왔다. 이젠 리스본을 완전히 떠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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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니모 수도원엔 사람들이 많은편이었다. i폰사진 밖에 없네. 칼사다 포르투게자- 돌 길


산타 아폴로니아에서 열차가 레일 위로 몸을 올릴 때, 철이 철을 두드리는 진동이 북처럼 울렸다. 버스의 편안함 대신 이 덜컹거림을 고른 건, 움직이는 동안에만 또렷해지는 문장들이 있어서였다. 창밖 낮은 구릉이 흘러가고, 나는 자연스럽게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떠올린다. 그리고 리스본으로 향하는 그레고리우스를 떠올린다.

그레고리우스가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차를 탈 때, 그 속에는 늘 한 겹의 다른 뜻이 붙어 있었다. 그가 리스본으로 간 이유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한 권의 알 수 없는 책이 남긴 흔적 때문이었다. 그는 책 속 이름들을 따라 여러 사람을 만난다. 누구의 기억은 찬양이고, 누구의 기억은 경계였다. 한 사람의 진실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곧 자기 자신도 한 문장으로 결론 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가 얻은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견디는 힘이 아니었을까. 무엇을 선택했고, 무엇을 미뤘는지—자기 삶의 균열을 더는 모른 척하지 않는 힘. 그러므로 그에게 리스본은 도착지가 아니었다. 자기에게로 향하는 방향을 다시 잡아주는 지점이었다.


반면 나는 지금 리스본을 떠난다. 방향은 다르지만, 떠남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떠나는 사람은 결국 같은 일을 한다. 자기 안의 어떤 문장을 끝까지 따라가는 일. 다만 그에게 리스본이 ‘나를 찾는 지점’이었다면, 나에게 리스본은 ‘반복해서 떠나는 도시’다. 나는 이곳을 여러 번 떠났고, 또 여러 번 돌아왔다. 그래서 이번 떠남은 새로움으로 가는 길이라기보다, 내가 떠나온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 생각한다. 떠남이 곧 귀환이 되는, 원형의 움직임.

열차는 앞으로 달리고, 생각은 때로 되돌아가고 또 앞질러 간다. 흔들리는 객차 안에서 나는 그레고리우스의 질문을 내 질문으로 바꿔 쥐어 본다. 용기인가, 더는 미룰 수 없음인가. 그리고 깨닫는다. 떠남은 결심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회복의 방법일 때가 많다는 것을. 떠나야만 다시 돌아갈 수 있고, 떠나야만 내가 남겨둔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오래 달리던 열차가 아베이루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창밖으로 물빛이 넓게 번지며, 대서양 쪽에서 밀려오는 햇살이 객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나는 바다라고 착각했다. 파도가 보이지 않아도,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의 숨이 분명히 느껴졌다. 물과 하늘의 경계가 잠깐 흐려지자, 내 생각도 그만큼 느슨해졌다. 밀려왔다가 부서지는 물빛을 보며 깨닫는다. 반복은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견디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포르투에 가까워지자 열차는 종착역인 캄파냐(Campanhã) 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직전, 여행의 절정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열차가 속도를 줄이며 도루강을 건너는 철교 위로 올라서는 순간—발밑으로 현기증 같은 허공이 열렸다. 강은 깊고 느긋하게 흐르고, 양쪽으로는 포르투와 빌라 노바 드 가이아의 지붕들이 교차한다. 강 위에 점점이 떠 있는 하벨루 배들, 강가에 붙어 있는 붉은 골목들. 철교 위를 지나가는 굉음은 낯선 이에게 “이제 도착했다”라고 알리는, 어떤 성스러운 전주처럼 들렸다.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이 오래된 도시의 피부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porto-sao-bento5.jpg 갈아타고 한 정거장 와서 내린 상벤투 역

캄파냐 역에서 내린 뒤에는, 도심으로 들어가는 상벤투(São Bento)행 근교열차로 갈아탄다. (짧은 구간이고, 한 정거장을 이어가는 이동이라 환승이면서도 환승 같지 않다)

기차가 상벤투 역에 닿았을 때, 나는 한동안 아줄레주 앞을 떠날 수 없었다. 그 푸른 타일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 기록에 가까웠다. 말이 아니라, 오래도록 남는 표면. 손이 하나씩 맞물려 만든 반복. 리스본의 칼 사다가 발밑에서 길을 지어주었다면, 포르투의 아줄레주는 시선 앞에서 시간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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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왔다. 저녁 시간임에도 아직 날은 밝았다. 숙소가 가까워 먼저 짐을 옮겼다. 그리고 늦은 오후, 나는 속도를 늦춰 도루 강변 쪽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은 강변까지면 충분하다고, 마음이 먼저 정리해 주었다. 충분하다는, 다음 날을 위해 남겨두는 문장이다. 노을이 붉어짐을 기대하며.



* 오늘의 파두

Sei de Um Rio (나는 어떤 강을 알고 있다)

흐르는 강을 상징으로, 사랑, 시간, 기억,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풀어냅니다. 고전적 파두와 현대적 감각을 잇는 곡으로 언급되고 있답니다.

https://youtu.be/qHd29PzExxc?si=J22E9bSyNov-2BFw

상벤투 역, 아줄레주 앞에 서면 푸른색은 더 이상 색이 아닙니다. 오래된 시간이 타일의 표면에 눌어붙어, 말 대신 빛으로 남아 있는 기록.

그 앞에서 이 곡을 들어보면 좋습니다. 제목은 “나는 어떤 강을 알고 있다”쯤?

아줄레주의 푸름을 물쪽으로 천천히 데려가는듯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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