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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Nov 28. 2023

친절한 말로 무료배송을 받았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은 못 갚았지만 배송비 5000원 정도는...

1.

학계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전화를 할 일도 받을 일도 없었다. 모든 소통은 이메일로, 미팅으로, 세미나로, 논문으로 한다. 그런데 학계의 울타리를 빠져나와 회사에 취직하자 갑자기 전화할 일 투성이다.


2.

나는 전화가 너무 싫다. 전화 말고 이메일로 하고 싶다. 이메일로 하면 똑 부러지게 문의할 수 있는데, 전화로 하면 총기가 사라지고 어리바리한 인간이 된 기분이다. 긴장하면 나오는 염소 같은 목소리도 싫다.  그래도 어쩌겠어. 필요하면 해야지. 뭐 별 수 있나. 비록 목소리는 가늘게 떨려서 염소마냥 매애~ 매애~ 할지라도.


3.

뭐 그래도 직장인 짬바가 있어서인지 (없다) 대부분의 통화는 별 탈 없이 잘 끝난다. 처음 입사해서 전화할 때에 대본 작성해서 (그리고 그 대본을 출력해서) 읽으며 전화했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4.

문제는 내가 임기응변에 약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전화를 받거나,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로 흘러가면 괜한 뻘소리를 하기도 한다. 크게 실수한 것도 아닌데 미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든다.


5.

하지만 이런 걱정은 약과다. 전화통화가 가장 무서운 경우는 빌런과 통화할 때이다. 나는 태어나서 가장 많은 하대와 천대를 전화통화를 통해 받았다. 얼굴 보고는 저 정도로 무례한 인간이 없는데, 통화할 때면 아주 무례한 사람 투성이이다.


6.

인간들은 전화를 통해 의사소통할 때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아니면 원래 나쁜 인간이 전화를 할 때 그 본성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이거나. 메일로는 대부분 정중한 사람이 많고, 얼굴 맞대고 미팅할 때에는 유쾌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많은데 유독 전화할 때면 못돼 처먹은 짜증 내면서 갑질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전화를 할 때에는 짜증이나 답답함을 감추는 노력을 확실히 덜 하는 느낌이다. 이메일은 글로 남으니 더 정중하게 쓰는 것 같다. 면대면으로 만났을 때에는 진짜 3d의 인간 덩어리가 앞에 있으니 조심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화는 이도저도 아니어서인지 개인의 인성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7.

말로 하는 전화통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이메일과 달리 휘발되어 없어진다. = 증거가 남지 않는다.

만질 수 있는 실체가 내 앞에 없다 = 막 대해도 죄책감이 없다.


그래서인지 콜센터 같이 전화통화를 전문적으로 하는 곳에서는 무례한 인간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이 두 지점을 공략한다.


이 통화는 녹음된다 = 휘발되어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전화를 받는 사람은 누군가의 가족이다. = 만질 수 있는 실체가 전화를 받고 있다.


8.

콜센터에서 이런 합리적인 노력을 하더라손 치더라도 무례한 인간은 여전히 무례하다. 그 이유는 무례한 인간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다. 무식한 인간은 통화가 녹음된다는 말이 “본인의 질 낮은 인성이 증거로 남는다”는 뜻인줄 이해하지 못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만질 수 있는 인간이 전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지능이 달리는 것이다.


9.

그리고 이 머리 나쁘고 그로 인해 무례한 인간들은 일정한 확률로 등장한다. 전화를 여러 통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머리 나쁜 진상을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처음 회사에 취직하고 몇 번의 통화를 경험하면서 나는 일명 콜 포비아가 생겼다. 다시 말하지만 태어나서 받아본 적 없는 하대를 전화 통화로 받았다고나 할까.


10.

어느 순간부터 죄송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죄송하다고 하게 되었다. 정당한 요구를 하면서도 바짝 엎드려 제발 해주십시오 하는 태도로 부탁했다. 행여나 전화를 받으시는 분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일을 크게 만드느니 마음껏 갑질하게 내버려 두는게 덜 귀찮아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11.

그 일은 내가 중고거래를 하는 날 일어났다. 나는 다급하게 택배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판매하는 쪽이었는데 받는 사람 주소를 잘못 적은 것이다. 물건은 엉뚱한 곳으로 배송되는 중이었다. 돈도 이미 받은 상황이어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 평화로운 중고나라의 사기꾼으로 몰릴 판이었다.



12.

택배회사의 상담원은 친절하게 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시바삐 물건을 올바른 주소지로 배송해 달라고 부탁했다.


상담원은 이렇게 응대했다.

고객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이런 경우 추가로 택배비가 발생하시는데
괜찮으실까요?


모든 일은 주소를 잘못 적은 내 책임이니, “배송비는 내가 부담하겠노라고” 막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13.

나는 대답했다. 이건 100% 내 과실이니 당연히 돈을 내겠다고. 그리고 전화받으시는 분은 잘못한 게 전혀 없으시니 죄송해하실 필요도 전혀 없다고.


14.

별 뜻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딱히 상담원을 위로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이 그랬을 뿐이다. 상담원은 물론 택배 회사도 잘못한게 없다. 100프로 내 잘못이며, 엄밀히 따지면 불편은 내가 상담원에게 주고 있었다.


그런데 상담원은 나의 말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상담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추가로 납부해야 하는 배송료는 문자로 알려주겠다고 하며 황급히 전화를 마무리했다.



15.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배송료를 면제받았다. 나랑 통화한 그 상담원이 본인 재량으로 내 배송비를 공짜로 만들어 줬다고 한다.  다른 상담원을 통해 나중에야 전해 들은 사실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배송료 안내 문자가 오지 않아 다시 전화했었다.)


16.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은 것은 아니지만 배송료를 면제받았다. 크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기분이 묘했다. 죄송하지 않은 일에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것에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저 정도의 말이 친절한 축에 든다는 것이 조금 어이없었던 것도 같다. 한편으로는 상담원에게 배송료를 면제해 줄 수 있는 재량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리고는 이내 씁쓸해졌다. 친절한 고객에게 쓰라고 준 재량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무턱대고 우기는 진상에게 최후에 쓸 수 있는 재량일 것 같다.


17.

사실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당연한 말에 할 갑자기 아무 말 없어진 상담원과, 몇 초간 지속되었던 어색한 침묵이 나에게는 의외로 강렬한 기억이었나 보다.


나는 이제 전화를 할 때 오히려 평소보다 더 친절하다.


별것 아닌 줄 알았건 나의 작은 친절이

배송료 5천 원어치 정도는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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