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트 설계의 네 가지 단계
커리어를 돌아보다
IT 서비스 기획자로 10년 넘게 일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왔다. 비록 아주 작은 기능일지라도, 머릿속의 아이디어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되는 재미를 알아가며 신입 시절을 보냈고, 프로덕트를 설계하고 개발자나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기본 역량을 다지며 주니어로 성장했다. 기획자로 일한 지 만 5년 정도 되었을 때 화면 없이 음성으로 조작하는 하드웨어의 도메인 서비스 기획에 도전했다. 그동안 해오던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의 기획을 고민해야 했고, 기획을 하고 동료들과 리뷰하는 과정에서 명확하고 정교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프레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새로운 도전은 시장과 회사 상황의 변화로 약 1년 만에 마무리되었고, 이후 신규 사업팀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하는 일을 하게 됐다. 사용자 가치와 핵심 컨셉을 깊이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고, 이 무렵 내가 만들고 싶은 서비스도 처음으로 생겼다. 우연히 좋은 멤버들을 만나 사이드 프로젝트 형태로 내가 만들고 싶은 서비스를 실제로 출시하고 기대보다 좋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항상 함께 있듯이, 마음껏 꿈을 펼쳐 작은 성공을 거둔 이 경험은 부작용도 있었다. 회사에서 리더십이 제시하는 비전에 공감하기보다는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저렇게 하면 좋을 텐데'하는 불만스러운 마음이 점점 커진 것이다. 결국 좀 더 작고 빠르게 움직이며 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조직을 찾아 회사를 떠났다. 이후 2년간은 다이나믹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바깥으로는 관심사가 '서비스'에서 '조직' '리더십' '팀' '창업'등으로 넓게 확장되었고, 안으로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좁혀졌다. 지금 시점에 내가 원하는 것을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다. 1. 리더십의 비전에 대한 공감 2. 역량 있는 팀원들과 팀플레이 3. 어느 정도의 안정감. 이후 내 커리어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았다는 것은 좋은 신호다. 이전보다는 조금은 더 넓은 시야로 판단하고, 쉽게 들뜨거나 지치지 않고, 이전엔 보지 못했던 작은 즐거움들을 더 잘 찾아내며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있다. 여기까지가 그동안의 커리어에 대한 소회였다. 지금부터는 내가 스스로 정의해 본 프로덕트 설계의 네 가지 단계에 대해 소개해 보겠다.
요즘은 '기획자' 보다는 '프로덕트 매니저'로 많이 부른다. 프로덕트 매니저는 프로덕트 설계 외에 더 다양한 역할을 한다. 내가 이 글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디자인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단계의 '프로덕트 설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밝힌다.
1부 서비스 상위 기획이란 무엇인가
내 링크드인 프로필에는 '서비스 상위 기획과 상세 기획이 모두 가능하다.'라고 적어 두었다. 그렇다면 서비스 상위 기획과 상세 기획은 각각 무엇이며 어떻게 다를까? 내 생각에 서비스 상위 기획이란 사용자 가치와 서비스 컨셉, 서비스 핵심 용어를 잘 정의하는 일이다.
사용자 가치
IT 서비스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온라인 도구다. 이 온라인 도구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사람들의 명백한 필요와 숨겨진 욕망을 해소해 준다. 이 도구를 설계하려면 첫째,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둘째, 사람들의 필요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는 심도 깊은 이해라기보다는 구조나 원리를 이해하는 수준이면 된다. 온라인 서비스 기획자로써 필요한 수준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는 개발자나 디자이너와 협업해 프로덕트를 만드는 경험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내가 설계하려는 도구가 어떤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지, 이 테크놀로지의 원리나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프로덕트 기획의 출발이 '테크놀로지'가 되어선 안된다. 테크놀로지는 수단일 뿐 기획의 출발은 '사람들의 필요나 욕망'이어야 한다. 이 도구를 통해 사람들은 어떤 가치를 얻을 수 있는가? 사람들은 왜 이 도구를 쓰는가?를 고민하는 일이 '사용자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서비스 컨셉
사람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도구를 사용할 때 도구와 만나는 접점이 인터페이스다. 온라인 도구를 설계하는 일은 사용자가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인터페이스를 통해 무슨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정의하는 일이다. 이때 도구에서 수행하는 핵심 인터페이스와 행동들이 한 가지 컨셉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으면 사용자가 쉽게 도구를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컨셉이 도구의 핵심 인터페이스와 행동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어야 하지 '참신한 컨셉을 만들고 싶다.'라는 유혹에 빠져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컨셉, 인터페이스, 사용자의 행동은 애초에 하나의 완전한 삼각형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삼각형을 잘 찾아내는 일은 도구의 본질을 잘 이해하는 일과도 같다.
서비스 핵심 용어
이 삼각형을 잘 찾았다고 해서 상위 기획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 도구는 도구의 인터페이스와 사용자의 행동이 모두 '데이터'의 형태로 존재한다. 서비스의 핵심 인터페이스와 행동이 ‘데이터'와 1:1로 치환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정의해야 이후 과정에서 혼선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한 번에 뚝딱 이루어지진 않는다. 도구를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치열한 토론을 통해 핵심 용어를 잘 정의해야 한다. '이 인터페이스는 사용자의 행동을 유발하는가 억제하는가? 이 인터페이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용자의 행동이 사용자 스스로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등의 깊이 있는 질문이 필요하다. 서비스 핵심 용어를 정의하는 일은 도구의 뼈대를 설계하는 일이고, 사용자의 행동을 유발하거나 억제하는, 최종적으로는 사용자 가치를 좌우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다.
사용자 가치, 서비스 컨셉, 서비스 핵심 용어를 정의하는 일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있는 아이디어를 도구의 형태로 스케치해 보고, 이 스케치를 도구 제작을 위한 정교한 설계도로 바꾸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단순히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아이디어는 누구에게나 있다.) 혹은 어떤 아이디어를 온라인 도구의 형태로 그릴 수 있다고 해서(서비스 기획자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그릴 수 있다.) '상위 기획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용자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 도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인터페이스, 사용자 행동, 그로부터 도출되는 하나의 컨셉 그리고 명확한 서비스 용어로 정의해 낼 수 있어야 서비스 상위 기획의 전 과정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제 기획자는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인터페이스에 대한 이해와 서비스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본다. 도구의 인터페이스와 사용자 행동은 거의 하나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1부 서비스 상위 기획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이다. 2부는 서비스 상세 기획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1,2부의 내용에 실제 사례를 덧붙여 업데이트해보려 한다. 이렇게 정리하면서 스스로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 고민한 내용들이 앞으로 일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지침서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이 글이 프로덕트를 설계하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되기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