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기억의 숲 속에서 자라나는 수풀에 가려지고
이불을 걷어차고 다시 앉는다. 책상 위의 디지털시계가 새벽 2시를 알리며 어둠을 숫자만큼 도려내고 있다. 지독한 피곤함이 몰려오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리모컨을 눌러 황색 조도를 20%로 낮춘다. 까끌까끌한 눈에 ‘다쿠아프리’ 점안액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자 차가운 액체가 눈동자를 적신다.
침대 끝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제 그만 자고 싶다’는 간절함이 나를 약장 앞으로 이끈다. 이미 의사가 지시한 약을 먹었지만, 오늘 밤의 불안은 정해진 용량 따위는 비웃듯 진을 치고 앉아 떠나질 않는다. 귀찮은 듯 흰 알약이 든 비닐 약봉지를 찢어 입안으로 털어 넣는다. 물 한 모금, 그리고 곰돌이 모양의 멜라토닌 젤리 두 개를 씹는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지만 마음은 여전히 쓰다.
시간은 늘 일정하게 흐른다. 다만 그 흐름이 내 편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있을 뿐이다. 지금 흐르는 시간은 분명 나의 편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곧 뿌연 새벽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 베개 밑으로 머리를 밀어 넣고 ‘부디 잠들게 하소서’를 주문처럼 반복하며, 침대 머리맡에 접어둔 ‘토리의 작은 이불(4년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내 반려견의 애착 이불)’을 끌어안는다. 그러다 벼락처럼 한 문장이 머릿속을 스친다.
‘아! 엄마의 등급 신청을 다시 해야 하는데 ····.’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 새벽을 잠식한다.
엄마의 기억 저편에는 수많은 창문이 있다. 엄마는 그 창문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씩 닫아걸고 있는 듯하다. 엄마의 습관과 수많은 추억은 기억의 숲 속에서 자라나는 수풀에 가려지고, 나는 닫힌 창문 틈 사이로 손을 뻗어 그 기억을 끄집어내려 애쓴다. 그것은 숨 가쁜 줄다리기이다. 엄마가 붙잡고 있는 기억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또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침대에서 내려와 책장에 꽂힌 엄마의 진단 서류들을 들춰본다. 내 일기장의 11월과 12월을 되짚는다. 그동안 내 일기는 내 삶의 조각들이었으나, 엄마가 치매 판정을 받은 어느 날부터 엄마의 행동 변화에 대한 기록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엄마의 일상이 내 삶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의도한 기록은 아니다. 그저 엄마가 밀어내고 있는 일상의 기억을 단 한 조각이라도 붙잡아두고 싶은 본능적인 나의 몸부림이라고 할까.
노인요양등급 재신청은 3개월이 지나야 가능하다. 그 짧은 3개월 사이에 인지 저하가 얼마나 급속도로 진행되었는지 심사위원들에게 증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미 지난번 조사에서 엄마는 인지 점수만큼은 최고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동네 내과 원장님은 엄마를 오래 보아온 탓인지 엄마의 치매를 쉽게 믿지 않으셨다. 그 영향으로 진단서는 ‘치매 추정’이라는 애매함을 내포하게 되었고, 결국 스스로 밥을 먹고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등급 판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불과 2개월 만에 상황은 급변했다. 이제 엄마는 대소변을 실수하고, 옷 추스르는 법을 잊었으며, 스킨과 로션을 바르는 순서조차 혼동한다. 밤마다 들려오는 큰 소리의 잠꼬대는 학교에 다니느라 피곤한 학생의 그것이 아니다. 이제는 엄마의 뇌를 더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대학병원 의사의 단호한 진단서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망 원인 1위는 암, 2위는 심장 질환, 그리고 치매는 6위라고 한다. 고령화와 함께 치매 사망률은 매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의 사망률은 남성의 두 배가 넘는다. 통계청의 10대 사망 원인 중 심장(2위), 뇌혈관(4위), 당뇨(7위), 고혈압(8위), 간 질환(9위)까지. 이 모든 숫자가 엄마가 앓고 있는 질환과 일치한다. 순위표의 숫자들이 마치 엄마의 미래를 예고하는 주문처럼 서늘하게 나의 뇌에 박힌다. 어슴프레 한 여명이 다시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더 무서운 것은 오늘 엄마가 닫아 걸 또 하나의 창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