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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빛 Feb 13. 2021

호른 호른,  야들야들, 쫄깃한 고래고기

울산 고래고기

     

  “안녕! 나를 따라오면 ‘장생포 고래 문화마을’로 갈 수 있어요.” 도로변의 고래 모양 조형물들이 인도를 따라 마을로 안내한다. 마치 놀이공원으로 향하는 기분이다.

  장생포 ‘고래 문화마을’은 포경산업이 성황을 이루었던 60~70년대의 마을 모습을 재현했다. 당시 장생포 항구는 우리나라 최대 포경항이었다. 1899년 러시아 태평양 포경회사가 고래를 해체하는 장소로 선정한 이래 한국의 대표 포경기지였던 셈이다. 문화마을 이발소 앞에는 지폐를 물고 있는 강아지 조형물이 서 있다. 개가 종이돈을 먹을 일은 없을 테고, 돈의 가치를 모르는 개가 돈을 물고 다니는 것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장생포에는 그만큼 돈이 흔했다.   



  그러나 고래의 개체 수가 급격히 줄면서 1986년, 고래 멸종 방지를 위해 세계적으로 포획 전면 금지령이 내려졌다. 한국은 1978년 국제포경위원회(IWC : 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에 가입한 이후 현재까지 IWC의 협약을 따르고 있으며 어망과 통발 등에 걸려든 고래만 절차에 따라 유통시키고 있다.

  고래 문화마을에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이었던 미국의 탐험가이며 고고학자였던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Roy Chapman Andrews·1884~1960)의 집이 있다. 그는 울산 앞바다에서 귀신고래를 발견하고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그의 집 옆에는 포수의 집이 있다.

  추소식(남, 75세) 할아버지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고래잡이 포수를 시작했고 그 당시 포수들은 경험 많은 아버지뻘이었다. 현재 그 많던 포수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할아버지가 울산의 마지막 포수로 남아 있다. 어쩌면 한국의 마지막 포수일지도 모른다. 그는 포경이 금지될 때까지 15년을 더 일했다. 그리고 2015년까지 외항선을 탔으니 약 50년을 뱃사람으로 산 셈이다. 평생 잡은 고래 수가 400여 마리이고 일 년에 2-30 마리는 족히 잡았다고 한다.  



  “그 당시 부자라는 게, 농촌에서는
 한 마을에 방앗간 짓는 정도였지만
여기는 고래잡이 선박이 15 척이나 있었어.
사장이 13 집. 큰 기업주들이 농사짓는 사람하고 비교가 안 되었지.
 논 몇 마지기 가진 사람하고는 벌이가 달랐어.”

 

  그랬다. 개가 물고 다니는 지폐 몇 장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거대한 작살을 날려 포획한 고래를 포경선에 매달고 항구로 들어오면 해부장이 선두에 서서 고래를 해체했다. 하루 밤낮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큰 것은 며칠도 걸렸다. 부위별로 해체한 고래는 주로 일본으로 수출을 했다. 그렇지 못한 부위는 장생포 사람들이 먹었다. 소금을 넣고 삶아서 수육으로 먹거나 이것저것 부위별로 섞어 탕도 끓여 먹었다. 그때만 해도 고래고기는 돼지나 소가 없었던 바다사람들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울산에서 고래고기로 손꼽히는 곳은 3대째 이어지고 있는 ‘고래고기 원조 할매집’이다. 장생포 사람들은 ‘장생포 할매집’이라고 부른다. 1951년 故최말선 할머니가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는 식탁 두 개가 고작이었다. 그 전에는 고래고기를 새끼에 묶어 팔러 다녔다고 한다. 고래고기 열 덩이씩을 새끼에 묶어 반티(소쿠리)에 담아 시장에 이고 다녔다.


  장생포에서 아버지가 해부장을 하셨다는 윤두리(여, 72세) 할머니. 그녀는 어릴 적 고래고기 냄새가 밴 아버지의 옷도 집안의 공기도 싫었다.    

  “아버지가 해부장이었어. 큰 고래 잡아오면 칼 이만한 거 갖고 해체하는 해부장이었거든. 맨날 고래 냄새나고. 옛날에는 고래 잡으면 돈을 안주고 고래로 일당을 주는 거야. 그 고래 받아오면 엄마가 고래를 삶는 기라. 거 부산서도 고래고기 받으러 오는데, 담 밑에 솥걸어 놓고 고래 삶는 기라. 큰 고래 해체하면 이틀도 걸리고 보름도 걸려. 우리는 그 고래고기가 크면서 질린 기. 옷에도 냄새나 맨날 빨아야지. 그래 나는 고래 장사는 안 한다 했어. 그런데 우리 아들이 고래고기를 그렇게 좋아해. 어린 거는 호른 호른 맛있고 큰 거는 쫄깃해서 맛 좋다 하지.”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게 고래 특유의 냄새는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유능한 해부장이었던 아버지는 돈을 벌면 마을의 다방에 먼저 들렀다 오셨다. 동생이 9명이나 되었는데 빈털터리로 돌아오는 아버지 덕분에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픈 추억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머리카락이 세었고 세월이 흘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돔베고기(상어고기)와 고래고기를 제사상에 산적으로 올렸다. 자식들 결혼을 시킬 때도, 상이 날 때도 고래고기로 손님을 대접했다. 윤할머니가 15년 전 딸을 결혼시킬 때 고래 꼬리를 초장에 무쳐 내놓았더니 손님들은 대접을 잘 받고 간다며 한 마디씩 했다고 한다.



  고래고기는 열두 가지 맛이라고 한다. 부위별로 치면 살코기, 가슴살 우네, 꼬리와 지느러미를 얇게 썬 오베기, 내장, 갈빗살, 등살, 머릿살 등 50 가지가 넘는다. 요리법은 크게 다섯 가지. 껍질과 갈빗살, 내장 등은 수육으로 삶고 신선한 생고기는 파, 마늘, 참기름으로 버무려 육회로 요리한다. 밭고랑처럼 생긴 가슴과 뱃살은 우네라고 하여 회로 먹는다. 우네는 가슴 쪽은 흰색이고 서서히 검은색으로 변하는 부위로 고래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꼬리와 지느러미를 얇게 썰어 데친 오베기도 있다. 살코기 부위 중 심줄을 발라낸 막서리는 무를 뚝뚝 썰어서 소고깃국 끓이듯 끓인다.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하고 시원하게도 끓이고 된장을 넣어 구수하게도 끓인다.



  고래고기는 생각과 달리 냄새가 나지 않는다. 비린 냄새가 날 것이라는 선입견은 금물이다. 고래고기의 신선도는 포획 후 얼마나 오랫동안 물에 담겨 있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신선한 고래고기일수록 냄새가 덜하고 가격이 비싸진다. 돈을 더 주더라도 신선한 것을 받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우네와 오베기는 야들야들하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초장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고래고기는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하다. 그래서 과하게 먹으면 느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때는 산초를 넣은 김치와 먹으면 산초의 향이 느끼한 맛을 잡아준다.


  고래심줄만큼 질기다는 옛말이 있다. 그러나 고래심줄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묵처럼 부드러워진다. 그 귀한 고래심줄이 찌개의 국물 맛을 더욱 깊게 해 주는데 식기 전에 먹어야 고래심줄을 부드럽게 즐길 수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외워왔던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는 작살로 고래사냥을 하던 선사시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울산은 오랜 옛날부터 고래의 도시였다. 그 옛날, 무차별 고래 포획을 하지 않았더라면 울산 바다에서 노니는 따개비 달린 귀신고래를 지금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도움 주신 분]     

추소식(남, 74세) 선장님은 울산 장생포의 마지막 포수이자, 외항선 선장이었다.

윤두리(여, 72세) 사장은 해부장의 딸이었고 소라고래집을 운영한다. 소라고래집은 밍크고래 전문점으로 고래고기를 좋아하던 아들이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 위 글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원연합회 지역n문화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s://ncms.nculture.org/food/story/1992?_ga=2.120805704.1351539288.1613098536-477163452.1613098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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