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지난 몇 달 동안 나를 휩쓸고 지나간 모든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막연했다.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눈자위를 꾹 누르자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너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갔다. 어쩌면 내 기억 속에서 빛이 바래고 희석되었을지 모를 추억이 사실과 추측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었다. 그때 네가 나한테 그 말을 했었던가. 아니, 아니지. 그 전에 내가 너한테 분명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같은데. 어쩌면 내 목소리가 너무 섬약해서 너에게 가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들 사랑이 메말라가는 세상이라고 말하던데 어쩐지 그게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듯했다. 지금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벅찬 사랑들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니까. 사람들은 늘 사랑이라는 말로 모든 걸 정당화하려 들지만 안타깝게도 사랑과 공포는 늘 한 몸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한숨으로 가득한 공기를 내쉬고 비릿하고 찝찝한 공포를 들이 마시고 있다.
빈약함과 닮은 지극한 사랑은 늘 극렬한 공포를 그림자처럼 떠안고 다니기 마련이다. 마치 양면을 가진 동전의 앞과 뒤와 같다. 내가 널 이만큼 사랑해서 그래, 라는 말은 그러니까 넌 내 말을 들으라는 말로 전위되기 쉽다. 내가 너한테 쏟은 마음이 얼마나 큰데, 라는 말은 그러니까 너도 그만큼 나에게 돌려줘야 된다는 말로 치환되기 쉽다. 그들은 늘 사랑을 퍼부어 놓고 갚지 못하는 나에게 서운하다고 하지만, 들이부음 당한 나는 그 버거운 사랑을 입에서 게워내고 싶은 심정이다.
너와도 처음부터 이런 관계였던 건 분명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얼굴 속에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고, 그것은 아주 미묘한 것에서 비롯되는 찰나의 깨달음이었다. 어떤 것은 닮아서 친근했고, 또 어떤 것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끌렸다. 닮은 모습에서는 편안한 안정감이 있었고, 다른 모습에서는 특별한 동경이 있었다.
오가는 말들이 쌓이고 함께하는 추억이 무겁게 겹쳤을 무렵, 어느 순간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듯이 말하는 너를, 나보다 나에 대해 더 칼같이 정의 내려 주는 너를 보고 순간 소름이 끼쳤다. 끈끈한 관계였다고 말하는 너와 달리,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모든 게 기분 나쁘게 끈적끈적했다.
그렇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마음들은 짐처럼 무거워져 갔다. 떨어지고 싶어도 들러붙어 좀처럼 떼어지지 않는 접착제 같았다. 얽히고설켜 버린 실뭉치가 되어 풀어보려 안간힘을 써도 그 틈조차 주지 않는 너의 사랑에 질식할 때쯤이었다. 기어이 돌려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내가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두려 했을 무렵, 삽시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공포로 돌변한 사랑이 죽일 듯이 내게 돌진해 왔다.
지잉. 휴대폰이 울렸다. 반복되는 소리가 망치가 되어 내 두개골을 박살내는 것만 같다. 잠시 뒤 상상이 빚어낸 길고 가느다란 썩은 손톱들이 내 머리칼 안으로 들어와 빗질을 해대며 소곤거렸다.
자, 착하지? 전화 안 받고 뭐해.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래? 너 원래 남 얘기 잘 들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잖아.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잠식하는 목소리에 온몸의 솜털이 쭈뼛쭈뼛 솟아올랐다.
계속 울리는 진동에 나는 마지못해 이불 아래로 팔을 뻗어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았다. 이미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 위에 휴대폰을 올린 나는 온통 너로 범벅된 것만 같은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내가 너한테 마음 쏟은 게 얼만데.
사람 마음 갖고 이렇게 장난하는 거 아니야. 너는 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정말 너한테 진심이었어. 이런 식으로 손절하는 게 말이 돼?
정말 넌 나하고 끝내고 싶은 거야? 우리가 함께한 시간 좀 돌아봐.
그때 너도 행복했잖아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네가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내 삶에서 너를 도려낸다고 생각하니까 죽을 것만 같아.
차라리 내가 죽으면 그러면 봐줄래?]
눈앞의 글자가 흔들려서 몇 번이고 앞으로 되돌아가 읽어야만 했다. 손이 덜덜 떨렸고 목구멍에서 심장이 뛰는 것만 같다. 가진 용기보다 더 큰 용기를 내어 답장을 적으려는데 또다시 진동 소리와 함께 문자가 왔다.
[안 되겠다. 집 앞이야 지금 올라갈게. 비번 바꾼 거 아니지? 너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곧 도착해. 꼼짝 말고 있어.]
오지 마, 라고 답장을 보낸 손가락이 갈 길을 못 찾고 허공에 붙박였다. 제발, 제발, 소리 죽인 말소리가 공포에 질려 터져 나왔다. 검지로 스크롤을 내리자 그동안 함께 나눴던 대화들이 보였다. 장문으로 두서없이 이어지는 너의 문자에 비해 내 대답은 초라하고 변변찮았다. 대부분의 말들이 미안해, 알겠어, 안 될 것 같아, 라는 말로 끝났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분명 좋았던 날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찰나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려보았다. 눈 맞추는 빈도가 잦아지다가,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함께 웃는 순간이 쌓이다가, 슬픔을 나누게 되었다. 그랬던 우리 관계가 언제부터 갉아먹고 이지러지게 된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서로가 각별해지기 시작했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따듯하고 다정하게 바라봐줬던 눈과 눈 사이의 거리는 없어졌다. 남은 건 네 눈동자 안에 갇혀 살아야만 하는 나였고, 늘 네 곁에 붙박인 듯 서 있어야 하는 나였다.
잠시 뒤 계단에서 쿵쾅거리며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침대에서 후다닥 빠져나와 현관으로 내달렸다.
쿵쿵. 중지로 찍는 듯 한 노크 소리가 작게 두 번 울렸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킨 채 뚫어져라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띡띡거리며 도어락 비번이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삐빅 거리며 비번이 틀렸다는 소리가 울리자 신경질적인 욕지거리 소리가 들려왔다.
연속해서 비번이 틀리자 또다시 문밖에서 쿵쿵 문을 두드렸다. 불안해진 나는 외시경에 초점을 맞춘 채 손톱을 톡톡 물어뜯었다. 쿵쿵 거리는 주먹 소리와 톡톡 부서지는 손톱 소리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외시경은 너의 눈동자가 되었다가 너의 콧구멍이 되었다가 들춰진 악몽 같은 너의 입속으로 변해간다. 집 안은 목이 졸린 듯 고요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우뚝 서 있는지도 수분이 흘렀다. 어쩌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내 기대는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에 묻혀버렸다.
쾅쾅쾅쾅. 큰 소리에 놀란 나는 뒷걸음질 치고, 망치를 두드리듯 시끄러운 소음이 연이어 현관문을 강타했다. 신경질 난 손바닥에 쥐어 잡힌 손잡이가 달가닥거렸다.
“야, 문 열어!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목소리에 놀란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덜덜 떨고 있다.
“야! 안 열어?”
나는 화들짝 놀라 열림 버튼을 꾹 누른다. 무슨 조건반사인 것처럼. 네가 소리 지르면 나는 네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지금 같은 찰나의 순간에도 나는 지난날의 나를 질책한다. 띠로리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리고 바깥에 서 있던 네가 먼저 문을 홱 잡아당겼다.
두 눈이 마주치고 몇 초 동안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손으로 시선이 향한 나는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거기 누구예요?”
그때 문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소리쳤다.
대답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바닥에 손바닥을 짚은 나는 엉덩이를 뒤로 끌며 조금씩 물러섰다. 헝클어진 머리와 풀린 두 눈은 빤히 나를 응시하며 천천히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손안에 단단하게 쥐어진 그것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집안으로 함께 들어왔다.
“당신 뭐야? 뭘 들고...”
뒤따라 들어오는 소리는 안타깝게도 나에게 달려드는 속도보다 늦었다. 땀에 젖은 손이 내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온몸이 얼어붙은 나는 헉, 소리와 함께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