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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팸 구호 Oct 25. 2023

#9 매번 늦을 거면 그냥 오지 마

 나는 남들처럼 회사에 안 다니고 집에서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다. 수입이 좋을 때는 '프리랜서'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그냥 백수다. 아무튼 맨날 집에만 박혀있다 보니 사람 만날 일도 없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떠들기도 누가 불러주지 않는 이상 할 일이 없다. 주말에 친구 만나서 놀면 되지만, 인생을 변변찮게 살아온 탓에 매주 불러 낼 친구도 많지 않다.


결국 하는 거라곤 온갖 OTT를 죄다 구독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책을 보는 게 전부다. 회사에 다닐 때는 최근에 봤던 영화나 책을 놓고 많이 떠들었다. 이게 재밌니 저게 재밌니 하면서.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아서 뭔가를 다 보고 나면 인터넷에 해당 작품을 검색해서 사람들이 써놓은 감상평을 읽는 게 전부다. 내가 본 걸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거나 그들도 재밌었다며 맞장구를 치면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낸 해결책은 '소모임'에 가입하는 것이다. 내가 직접 만들어서 운영하기는 좀 귀찮으니 이미 만들어진 모임에 들어가는 게 맘 편하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임을 발견해서 가입했다. 처음엔 그냥 독서 모임이었는데 내가 들어가고 나서는 영화 모임도 종종 하고 글도 쓰고 그런다. 대단히 유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모두 같은 걸 보고 그것에 대해 떠드는 건 좋다. 내가 찾던 거다.


그 모임에서 몇 명끼리 글 써서 책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모임장이 꼭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책 만들기 프로젝트에 모인 사람은 모두 여섯 명. 김영하처럼 대단한 글재주를 가진 사람들은 아니고, 모임장 임의로 함께 하면 좋을 것 같거나 자주 나왔거나 독특한 시각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못해도 2-3주에 한 번씩 모여 현황을 공유하고 풀리지 않는 글을 서로 피드백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문제는 모일 때마다 나랑 모임장을 제외한 네 명은 언제나 늦는다는 것이었다. 이를 테면 3시에 모이자고 해도, 모두 다 모이는 것은 4시가 다 되어서였다. 원래 이런 건 남자들끼리 약속 잡을 때나 일어나는 건데. 그나마도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모임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냥 카페에서 모이는 게 아니라 스터디룸 같은 곳에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정해진 시간 동안 모였다. 당연히 그 돈은 모임 사람들 각자가 낸 돈이다.


한 명 정도 늦게 오는 건 그럴 수 있다며 넘길 수 있지만, 모두가 매번 늦으니 모임 시작 자체가 계속 지연되는 문제가 지속됐다. 늦게 와서 돈 내고 빌린 스터디룸 시간이 자꾸 날아가는데, 아무도 싫은 소리를 안 했다. 모두 괜찮다며 별일 없이 지나가니 왜 이렇게 매번 늦냐며 싫은 소리를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모일 때마다 그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약속 시간을 맞추는 게 당연한 건데, 그 당연한 말을 해서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기는 것도 싫었다. 후.


특히 그중 한 명은 모임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글을 대단히 잘 쓰는 것도, 뛰어난 식견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냥 외모가 호감이었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외모가 중요하다. 외모가 호감이 아니면 그다음은 궁금하지도 않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쨌든 그 사람을 책 프로젝트에 포함시킨 모임장에게 고마웠다. 자주 봐서 친밀감이 조금씩 생기더니, 그 사람에게 글쓰기 과외를 해주는 상황도 벌어졌다. 오? 이렇게 흘러간다는 것은 설마? 물론 그 사람도 언제나 약속 시간에 늦었다.


그 사람을 포함에 모두가 책 만들기로 자주 모여 친밀감이 생겨서 따로 만나 놀기도 했다. 그날은 여섯 명 중 넷이서 한강 공원에 놀러 가기로 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약속 시간 10분 전에 갔다. 이번엔 특별히 대관한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안 늦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틀린 생각이었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갈 곳도, 할 것도 없어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물고 거리를 서성였다. 약속 시간이 15분 정도 지났을 때, 내가 호감을 가졌다는 그 사람이 마침내 도착했다. 그녀는 15분 늦은 건 일도 아니라는 듯 사과 한 마디조차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보니 30분~1시간 정도 늦게 온다는 답이 왔다. 갑자기 10분 일찍 온 게 너무나 억울했다. 그렇다고 부족한 시간을 쥐어짠 것도 아니고 남아도는 게 시간이긴 하지마는, 한두 번도 아니고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빨리(15분 늦게) 도착한 그녀에게 진심을 80% 섞은 농담을 던졌다.


"이제 우리 모이면 한 2-30분은 늦게 와야겠어요. 빨리 와도 소용이 없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놀라웠다.


"뭘 그렇게까지 말해요. 앞에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잠시 '내가 겁나 예민했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군중의 가스라이팅인 건가. 유일하게 약속 시간에 늦지 않고 온 내가 예민하고 배려심 없는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반박하려고 했지만 참았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나 혼자 정상을 소리쳐봤자 그들에겐 내가 이상한 사람이었을 거였다. 그리고 저 발언 덕분에 그녀에게 가졌던 내 호감도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먼지가 된 사람들처럼 깔끔하게 사라졌다.


약속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둠'이라고 한다. '미리 정하여 둠'이라고 하질 않은가. 미리 정했다는 것은 다음번에 그렇게 할 것이라 '정했다'는 뜻이지 않나. 그런데 매번 안 지킬 거면 약속은 무엇하러 하는지 모르겠다. 미리 정했던 걸 나도 모르게 싸그리 뜯어고쳐서 새로 정했다면 좀 서운하겠지만 내가 몰랐던 거니 어쩔 수 없었을 거다. 그것도 아니면서 매번 늦고, 매번 그럴 수도 있다며 제시간에 맞춰 왔다가 길바닥에서 시간을 버린 사람의 사정 따윈 내팽겨 치는 게 맞나.


만나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2-30분은 무슨 20시간도 기다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 아니고서야 너그럽게 기다릴 이유가 없다. 약속 시간에 숨 쉬듯이 늦는 것들은 아마 앞으로도 분명 언제나 늦을 거다. 그것에 대한 자책감이 없을 테니 말이다. 대신 언제나 그렇듯 늦게 나왔다가 그간 쌓아 온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무너지는 경험을 꼭 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안 고쳐져서 다 무너진 자산을 조금 복구했을 때 또 무너져서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으면 좋겠다. 대체 어릴 때 뭘 보고 자랐길래... 그래도 회사는 일이니까 제때 출근하겠지? 가증스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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