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팸 구호 Sep 20. 2022

나도 몰랐던 내 습성

자취를 시작하고 알게 된 내 모습

오직 제 힘으로 밥벌이를 시작하기 전까지 평생을 부모님 품에서 지냈습니다. 초중고는 물론이고 대학교도 부산, 군대도 부산으로 갔거든요. 대학생 시절 집에서 학교가 너무 멀어서 잠깐 이모집에서 지냈던 한 학기 하숙, 잡지사를 체험해보겠다고 9개월 정도 서울에서 지낼 때 친구 집에서 얹혀살았던 적을 제외하면 모조리 부모님 집에서 살아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죄송하지마는 제가 나서서 청소나 정리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아빠 청소기 돌리는 소리에 깨서 마지못해 도와드리는 정도가 전부였지요. 그러다 서울로 취직을 하면서 처음 '자취'라는 걸 시작했습니다. 비록 모든 일이 세 걸음 안에 해결되는 3.5평짜리 방이긴 했습니다만.


처음 제 마음대로(집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에 매우 벅찼던 것 같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오늘의집이나 집꾸미기 같은 리빙 플랫폼을 알게 되었어요. 좋아요를 수천 개 씩 받은 자취방 사진을 보면서 내 방은 어떻게 꾸밀지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케아도 얘기만 들었지 직접 홈페이지까지 들어가서 기웃거려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싸고 예쁜 게 많더라고요. 혼자서 아이패드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가구 배치 같은 걸 했었습니다. 3.5평 따리 꾸미는 주제에 뭘 그리 요란을 떨었는지 모르겠는데, 나름 정말 설렜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대로 가구 사고 압축봉 사고 난리를 치면서 첫 자취방을 성공적으로 꾸몄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쯤부터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리와 청소였습니다.


잘 꾸며지고 정돈된 그 모습에 얼마나 만족한 건지, 그 모습에 변화가 생기는 게 무척이나 싫었습니다. 처음 방 사진을 찍었을 때처럼 테이블 위엔 예쁘장한 맥북만 있어야 해서, 밥 먹고 나면 곧장 치우고 맥북을 올려놨습니다. 예쁘게 보이려고 밥 먹은 잔해를 싱크대로 다 치워버리니 싱크대가 지저분해 보입니다. 지체 없이 설거지해서 없애버립니다. 설거지를 끝냈더니 싱크대 가장자리에 물이 잔뜩 튀었더라고요? 행주로 닦아서 물 자국을 없애줍니다. 다 한 거 같아서 침대에 앉으려고 봤더니 이번엔 이불에 꽂힌 머리카락이 보입니다. 이불이 베이지 색이라 매우 잘 보였습니다. 당장 뽑아서 휴지통에 넣습니다. 넣으면서 보니까 이번엔 휴지통 뚜껑에 뭐가 묻어있습니다. 휴지통이 흰색이라 잘 보였습니다. 재빨리 닦아줍니다.


이 얘기만 들어도 현기증 나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저런 게 거슬릴 줄 몰랐습니다.


이후 땅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보이면 당장 주워서 없애버리고, TV장에 쌓인 먼지가 보이면 바로 닦아서 없애고, 맨발로 다닐 때 발에 뭐가 붙는 게 싫어서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데코로 걸어놓은 목도리(사계절 내내 걸려 있었습니다)가 살짝 삐뚤어져있으면 밥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 각을 맞추고... 그랬습니다. 저도 제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급기야 냉장고에 음료수 넣을 때도 로고가 잘 보이도록 한치의 오차 없이 줄 세우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 방문한 사람들이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더군요. 정말 이렇게 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 돈 내고 사는 집이라 그런지, 집 안이 흐트러지는 게 월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처럼 싫었습니다.


정리와 청소를 효율적으로 할 방법을 찾아 헤매면서 개꿀템도 여럿 발견했습니다. 이를테면 타조털 먼지떨이 같은 것 말이지요. 정말 타조털 먼지떨이는 누가 발명한 건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사람이야말로 노벨상에 제격인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취생에겐 묠니르와 같은 물티슈는 먼지 제거 하기에 최악의 아이템입니다. 물자국이 생기거든요. 그리고 그 물기 탓에 먼지가 자기네들끼리 뭉치고 붙으며 뛰어난 협동심을 보입니다. 그런데 타조털 먼지떨이는 기름기+정전기 덕에 한 번 스-윽 훑어만 주면 군집해있던 먼지들이 마치 과학 시간에 실험이랍시고 해봤던 자석에 달라붙는 철심의 모습처럼 먼지떨이에 촤르륵 딸려갑니다. 먼지가 사라진 모습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정리된 그 모습을 유지하자'


썼던 물건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니니 처음 기거하던 곳으로 돌려놓고, 테이블에도 항상 밥이 있던 게 아니니 밥 먹기 전처럼 그릇들을 치우고 닦으면 됩니다. 싱크대에도 처음부터 그릇들이 쌓여있진 않았으니 곧장 설거지를 해버리면 됩니다. 어찌나 간단한지 흡사 운전면허 필기시험이 떠오를 정도입니다.


한껏 어질러 놨다가 마음먹고 치우려고 하면 너무 힘들어서 엄두가 나질 않을 겁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쓰레기도 티끌이 모이면 태산이 됩니다. 그냥 티끌일 때 바로 치우면 티끌만 해결하면 됩니다. 이런, 잔소리를 하려던 게 아닌데...


앞에서도 여러 번 얘기했지마는, 저도 제가 이렇게 깔끔을 떨 줄은 마치 미대륙 원주민들이 콜럼버스의 가톨릭 얘기에 '그게 뭔데?'라고 했던 것처럼 전혀 몰랐습니다. 28년 만에 처음 알았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여러분이 예상치도 못했던 취향이나 습성을 깨우친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그때, 발견한 취향이나 습성에 대해 한번쯤 깊게 생각해보세요. 삶의 새로운 장이 열립니다. 인생이 이렇게 재밌어요.(갑자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