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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오 Oct 18. 2022

나의 장례식 날을 고를 수 있다면

딱, 이 계절이면 좋겠다.


아이의 병간호로 내 몸과 마음이 시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1차 상황(고열) 종료로 월요일 오전 오랜만에 조깅을 했다.

얼마 만에 달리기인가. 외출할 때마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밟을 때마다

아, 이 햇살에 이 푹신한 낙엽들을 밟으며 조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다.


베를린에서는 귀한 10월의 햇살과 따뜻한 기온이 연일 지속되던 며칠이었다.

그날도 아침햇살이 길었고 덩달아 마음도 가벼워 묵혀둔 청소를 하고 있었다.

유치원이 찍힌 전화가 온다.

유감스럽게도 유치원에서 전화가 걸려온다는 건 나쁜 일 밖에 없다.

아이가 두통과 고열이 있어서 집으로 데려가라고 연락이 왔고 이제 막 청소가 끝나고 오후 커피 한잔을 마시려던 차였다.

“커피를 마시고 조깅을 하고 와야지”라며 평소와 다르게 알찬 계획을 세워두고 밀린 집 청소를 해치운 아침이었다.


물론 아이가 아픈 것도 걱정이지만

내가 세운 오늘 하루의 계획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일에 조금은 짜증이 났다.

아이가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갑자기 잡힌 발코니 공사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좋은 날을 마음껏 누렸을 텐데. 입이 삐죽 나온 상태로 씻지도 않은 채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다. 운동을 다녀와 씻을 계획이었으니 모든 것이 다 틀어져버린 셈이다.


내가 유치원에 도착했을 때는

아이들이 오후 낮잠을 자고 일어나 간식을 먹으려고 각자 자리에 앉아 있던 참이었다.

작은 녀석들이 작은 의자와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오물오물 간식을 먹고 있는 귀여운 모습도 잠시

힘없이 곧 녹아 사라질 것 같은 나의 아이가 보인다.

안쓰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꾸역꾸역 몸에 힘을 넣어 앉아 있는 아이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곧 울음이 터질 듯한 모습이다.

아이를 꼭 안아서 괜찮아. 집에 가서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하고 토닥여주고 아이와 유치원을 나섰다.

힘없이 축축 늘어진 아이를 한 손으로 잡고 아침에 가져간 자전거와 아이 가방 그리고 외투까지

챙겨야 할 짐이 양손 가득 찼다. 씻지 않은 내 꼴은 더 엉망이 되어버렸다.

아픈 아이를 데려오면서도 흐트러지는 나무들을 보며, 아, 오늘 오후에는 조깅을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을 한편에 담았다.

그때까지는 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아프게 될지 몰랐으니까.


그날 밤부터 아이는 일요일까지 나흘을 고열과 발진으로 고생을 했다.

보통 해열제를 이틀 정도 먹이면 삼일째는 호전되기 마련인데, 어째서 이번에는 두드러기도 심하고 열도 잡히질 않는다. 고열 때문에 평소 가지고 있던 아토피가 더 심해진 거라 생각하고 알레르기 약을 함께 먹여도 보았지만 나아질 기미가 없다.

2-3시간씩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아이의 병간호를 했다. 사흘째에는 제때 충전되지 못한 휴대폰처럼 내 몸에도 빨간불이 반짝반짝 경고음이 들린다.



월요일 아침 아이의 열이 잡혔다.

유치원에 보내도 될 만큼 아이의 컨디션도 좋아졌다. 아니 정말 이젠 보내고 싶은 내 마음이 더 간절했다.

하지만 여전히 입맛도 기력도 조금은 부족하고 두드러기 증상도 마음에 걸려서 오후에는 병원에 데려가 보기로 한다.

10월의 깜짝 선물처럼 오늘은 24도라는 따뜻한 날씨였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조깅을 다녀왔다.

반팔을 입고 뛰어도 무리가 없을 기온에 바스락 밟히는 낙엽소리가 행복하게 느껴졌다.


나의 조깅 코스 중 하나는 단정하게 가꾸어진 동네 공동묘지를 크게 한 바퀴 도는 것인데, 이렇게 예쁜 날씨에는 그곳에 있는 나무를 보며 조깅하면 잘 꾸며진 영화속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라 좋다.

묘지 입구를 막 돌았을때였다.

오늘 장례식이 있었는지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악수를 나누고 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떠난 이의 묘지 위로는 햇볕이 딱 좋을만큼 비추고 붉고 마른 나뭇잎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다.

남겨진 사람들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비석에 남긴 메시지를 눈으로 읽는다.

장례식에 온 이들 대부분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삶의 순리를 받아들일 겸허한 마음이 뭍어나 있었다.

묘지 입구를 돌아오며, 길 끝까지 뻗은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오늘 같은 날 장례식을 했으면 좋겠다.

남겨진 나의 이들이 나를 보낼 때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라면, 나를 보내는 일도, 남겨진 각자의 삶도 조금은 평안해지리라.

나를 보내는 날이 아름다운 풍경이라면 또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으리라.

만약 나의 장례식 날을 잡을 수 있다면 10월의 가장 따뜻한 날. 그날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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