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찬

2026 [한국문학인]

by 남쪽맑은물

먹을 수 없으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새삼스럽게, 그리고 깊게 생각하는 일이 있었다. 건강했던 P는 밥을 먹을 수 없어 응급상황이 발생했다. 점점 식욕이 없고(어쩌면 거식증일지도) 의욕도 사라지니 체중이 눈에 띄게 줄었다. 병원에서 촘촘하게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 영양제 처방과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라는 의사 소견이 있었다. 그러나 애를 쓴다고 식욕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살 수 없음과 죽을 수 없음 사이의 놓인 어두운 공포를 종종 느낀다. 짐승이 느꼈을 죽기 전의 두려움을 먹지 않기 위해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있듯이,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끈질기게 반항하면서 살아간다. 죽음에 순응한다는 말이나 마음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친 반항심이 이를 증명한다. 인간 수명이 길어지면서 잘 죽는 방법을 운운하듯이, 잘 사는 방법 중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 비결을 추앙하는 것처럼 말이다. 건강을 튼튼하게 유지하기 위해 먹는 약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먹는 일은 생명의 일차적 요소다. 삶의 원동력이라는 의미가 결합하면 먹는 일은 살아 있는 세월로 확장한다. 확장하는 세월이란 매우 입체적이다. 생명 유지만을 위해서가 아닌,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다층 다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기 삶이 먹는 행위라는 것. 먹은 일은 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화의 방향성과 삶의 개성을 제시하기도 하니 즐거움을 넘어 철학이 될 수 있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 (Babett’s Feast)」은 음식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사람과 사람 관계로 표현한다. 네덜란드의 한적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작고 작은 일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다. 종교의 힘으로 한 가족처럼 살아가는 마을공동체는 평화롭다. 그런데 정말 그들은 해야만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사이에서 얻는 종교의 능력으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종교는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일까.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은 무언가 불안하다. 본능적 욕구를 억제하는 행위와 종교의 여러 금기는 매우 심리적, 생리적 보편성을 파괴한다. 파괴는 평화로울 수 없다. 파괴는 깨뜨리거나 부수는 행위가 아닌가. 박살 나서 복구 불능한 상태에 이르기도 하지 않은가. 자유가 아니라 사슬이 될 수 있는 종교를 염려한 볼테르는 무비판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이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속박해 두려는 황소와 같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타인에 대한 불만과 미움, 서운함이 마음 바닥에 쌓여 있다. 이러한 서름서름한 반목은 고인 물처럼 찰랑댄다. 매일 똑같은 기도문을 낭독하면서 평화로운 마을을 유지하는 것 같지만 겉치레일 뿐이다. 어쩌면 윤기 없는 일상을 지탱한다는 의미가 적당할 것 같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의자같이 그들의 반목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은 솔직한 표현에 서툴고 그런 마음을 표현할 길이 막힌 막다른 골목 같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매일 기도하지만, 이웃이 미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끈적끈적한 그 무엇이 입가에 달라붙은 느낌이다. 마치 마음에 풀칠이라도 한 것 같은 답답함이 마을 구석구석에서 흐르지 못하는 공기처럼 빙빙 돈다.



예수의 초상화 앞에서 성물을 만지며 은밀하게 하는 기도는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예수를 비롯한 성인들의 우아한 초상화를 보면 오히려 교훈적이라는 생각보다는 일종의 모욕감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성인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초상화에 담긴 표정이 너무나 인위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고통을 다 겪은 표정이라기에는 무언가 방해를 받는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복제한 성인의 초상화로는 세상의 고통을 표현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그런데 이러한 어석거리고 버석거리는 반목이 와해한다. 바베트가 마련한 만찬으로. 바베트는 프랑스에서 최고급 요리사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 마을에 오게 된 바베트는 이웃을 위한 빵과 수프를 만들면서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바베트는 만찬을 주도하게 된다. 프랑스 최고급 요리로 말이다. 바베트가 준비한 요리가 얼마나 고급 요리인지를 자조적인 삶을 살아온 이 마을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초상화 앞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 앞에서, 그 음식을 만드는 정성 앞에서, 마음을 나누는 시간 앞에서 그들이 만지작거렸던 반목이 스르르 풀린다.


P는 더 이상 체중이 빠지지 않기 위해 애쓴다. 여전히 식욕이 없고 몸무게가 늘지 않지만, 매일 밥을 먹는다. 곡기를 끊으면 안 되는 이유를 P도 잘 알고 있기에 하루에 세끼를 먹고 간식도 먹는다. ‘곡기를 끊으면 죽는 것이다’라는 말은 노인병원에서만 회자하는 말이 아니다. 먹지 못하는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그러니 먹는다는 행위는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우리는 먹는 힘으로 살아가지만, 먹는 행위처럼 욕망을 잘 표현하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잡아먹을 듯이’, ‘잡아먹야겠다’, ‘날 잡아 잡소’라는 말은 매우 무서운 표현이다. 잡아먹는다는 의미는 인간이 지닌 공격성과 잔인성을 폭로하는 것이며 욕망을 매우 저급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무언가를 잡아먹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사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먹는 일이 누구에게나 소중하지만 먹을 것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우리의 삶이 먹잇감이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할 때가 있다. 공상으로 끝나버릴 이야기면 좋겠지만, 넘쳐나는 먹거리에 아무 생각 없이 주섬주섬 우리의 삶을 넘겨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오늘 펼쳐질 만찬이 어떨까. 누구와 함께, 어떤 음식, 어떤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등등, 화려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지만 정성을 다한 기도문 같은 만찬을 즐기고 싶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 기도와 귀한 삶을 축복하는 만찬은 유약한 몸과 마음을 살아있게 하므로 그리 요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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