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수필오디세이]
바다 한가운데 넓게 펼쳐진 섬, 가파도. 어디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섬의 끝과 끝. 너무 깊이 숨어있지 않아서 새벽빛으로도 식별할 수 있는 섬의 구석구석. 바람의 세기가 강해 농사짓기 어렵지만, 청보리가 잘 자라는 섬. 푸른 바다를 닮아 봄바람에 나부끼는 푸른 청보리 물결. 시선을 막지 않는 섬이 지닌 자율성으로 밭고랑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꽃들. 자율성은 각각의 고유성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것이 고유성이지만, 섬만이 가진 고유성으로 봄을 발산한다. 청보리와 꽃들이 살랑이는 봄을 환영한다.
바람이 유난히 많이 부는 가파도에는 높은 것들이 없다. 유채꽃과 청보리가 넘실대는 풍경은 바람결 그림자다. 키 작은 섬처럼, 낮은 건물과 어울려 지내는 섬마을 사람만의 그림자가 섬 문화를 형성한다. 육지에서 귀한 것이 섬에서 흔하고 섬에서 흔한 것이 육지에서 귀하다. 자연현상에 적응하며 살아온 인생은 저마다 빛과 소금으로 세상의 부분이 된다.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 아들과 관광객에게 자연산 해산물 음식을 파는 부모의 삶이 가파도 풍경화다. 섬과 섬을 이어주는 영속한 존재인 바다는 자연친화적인 삶이다.
배를 탔는데 비가 왔다. 비옷을 입고서라도 섬을 걷기로 한다. 배를 타고 온 모슬포항을 바라보니 바다 건너 멀리 보이는 건물이 마치 나를 배웅하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는 사람처럼 보인다. 나의 하루는 가파도의 풍경이 될 것이다. 섬 속의 섬에서 비를 맞으며 해변을 걷는 일은 아마도, 내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특별할 수밖에 없는 하루일 것이다.
언덕 하나 없는 섬, 어디서나 탁 트인 곳이 보이는 섬, 가오리를 닮았다는 섬, 한라산과 송악산 그리고 산방산까지 조망이 가능한 섬, 마라도가 보이는 섬, 일몰과 일출을 볼 수 있는 섬에서 습기 찬 이야기가 생성된다. 비옷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기승전결과 상관없는 누군가의 이야기 같다. 고즈넉한 빗소리와 파도 소리의 협연은 마치 발걸음에 리듬을 맞추듯, 운치가 있다. 비에 젖은 이야기는 흡인력이 있다. 그것은 기획자 의도가 투영되지 않은 생생한 다큐멘터리처럼,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깨끗함이다.
바다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비와 바람이 바다를 타고 아우성치는 소리조차 나의 이야기다. 헤맴의 서사다. 바다처럼, 푸른 눈물이다. 비바람이 부는 섬에서 과거의 흔적을 파헤치고 있다. 지독하게 헤매던 날들은 바다 곁에서 듣는 파도 소리의 이력이다.
언제부터 헤매기 시작했을까. 저마다 일생에서 무언가를 결정짓는 여명의 순간이 헤맴의 신호가 아닐까. 결정이라는 것은 마무리가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 결정과 결정으로 퇴적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헤매던 자취를 목도하는 것이 삶이 아닐까. 이성적 가치로 사회적 합의를 이루면서 생각의 전환점을 갖게 되면서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성숙한 인간이란 그 아픔을 기억하고 아픔의 근거를 남기고 아픔의 유산을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자기를 타이르며 아픔을 다독이는 결정의 전환점에서 또다시 헤맴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은 계절이 다가오는 기미들을 눈치채는 것과 비슷하다. 기억은 다양하게 편집되는 물리적인 허점이 있지만, 그로 인한 생각의 변화는 현재와 미래를 이어가는 마음이 된다. 바람이 차가운 새벽에 폐허 같은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뜬금없이 서늘한 날, 그것도 새벽에, 뜨문뜨문 연결되는 기억으로 삶의 연속성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생의 한가운데에서 자기를 마주하는 시간이다. 정하지 않은 방향이나 삶의 태도를 다듬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 어디에선가 푸르른 새싹이 돋아나는 시간에도 삶의 방향은 회전하고 있느니.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개인의 소망이나 가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개인의 가치는 자기 문화의 확장으로 변혁한다. 인간은 예술 언저리에서 기웃거린다. 예술문화의 소용돌이에 빙글빙글 돌고 있는 자신과 타인을 발견하며 즐거워한다. 타인의 표정에서 공감의 순간을 만나면 잘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실망한다. 우리는 실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희망만 있다면, 희미해져 가는 희망만 붙들고 있었다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졌을지 모를 삶이다. 너무 이르게 찾아오는 실망일지라도 그 실망의 실마리를 잡고 실망하면서 산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슬로건이나 캠페인을 마주하기는 하지만 공허한 희망가에 흥을 잃어버리다 보면, 희망은 희망 사항으로 귀결됨에 실망하게 된다. 그러면서 마음고생한다. 마음이 다치고 깨지고 피가 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희망 사항이라고 넋두리하면서도 무언가를 알게 되는 표정이 있다. 그 표정은 그 무언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서야 실망의 실체를 만나게 되는 얼굴이다. 그러다 보면, 실망한 것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한다. 싸늘했던 긴장이 풀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는 것이다. 헤맴이란, 기대감이 실망으로, 실망에서 또 다른 기대감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아닐까. 실망의 부스러기를 모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헤매고 있는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울퉁불퉁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를 지나고 일몰전망대에서 비를 피한다. 자연산 해물짬뽕을 먹고 갈옷을 파는 가게에서 상품을 구경한 다음, 다시 걷는다. 비가 점점 약해진 바다를 보니 통통 튕기던 빗방울 놀이도 시들해진다. 빗방울을 머금은 싱그러운 청보리의 푸른빛도 싱그럽게 흔들리는 헤맴의 신호다. 그것은 알곡이 되는 기대감이다. 돌무더기를 지나 선착장으로 돌아오니 현실에서 미래로 향하는 시선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것은 푸르른 것들을 남겨두고 돌아갈 곳으로 향하는 발길이라는 것. 어떤 기교도 섞이지 않은 웃음이라는 것.
삶은 상투성의 잔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는 식상한 문구가 철학의 정수인 것처럼, 익숙하고 친근함 속으로 흘러가는 삶의 방향이 자연스러운 이치이기에. 나를 태울 배를 기다리며 여기에 남겨두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것은 빗속에서 걸었던 가파도의 하루가 문학이라는 것. 지금까지 헤매고 앞으로 헤맬 나의 서사가 허구를 허용하는 예술이라는 것. 지극히 자연과 친숙한 하루가, 바다 언어로 풍요로운 하루가, 비를 맞으며 헤매던 하루가 지나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