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팔백 미터

[계룡수필] 원고

by 남쪽맑은물 Mar 01. 2025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이다. 아니 못했던 일이다. 돌아올 날짜를 정하지 않고 혼자 떠나는 일. 일상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짐을 챙기고 떠나니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두려움이 밀려왔다. 행선지를 정하는 것부터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아무 걸림돌이 없는데도 시간을 계산하고 목적지를 정하다 보니 점점 떠나는 일이 망설여졌다. 아마 현실에서 멀어지면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의식 때문일까, 그 삶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까, 그 삶에 길들여진 습관 때문일까, 싶어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미래를 믿지 못하는 에부수수한 마음이 고개 들기 시작하면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마음으로 떠나려던 여행이었다. 패배한 현실을 인정하며 특별한 계획과 상관없는 여행이었다. 현재보다 미래를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견고해지는 현실에서 몰아치는 거센 기운이 겁이 나 내 자리를 피하는 떠남이었다. 빈자리가 어떤 것들로 채워질까를 기대하는 여행은 더욱 아니었다.

영동에서 무주로 가는 길이었다. 겨울 저녁은 산 그림자를 데리고 일찍 어둠을 불러냈다. 인적도 없고 오고 가는 차도 없는 도로에 내 자동차만 움직이고 있었다. 차 전조등으로만 길을 밝히고 있었다. 자우룩한 현실을 생각해야 했다. 안개 낀 것처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밤이라는 현실을. 이 어둠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로지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그랬다. 달랑 동그란 전조등 불빛 두 개에 의지한 채 산길을 달리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어둠 속에서 다른 불빛이 보이기를 고대하며 달렸다.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길을 꼼짝없이 갈 수밖에 없었지만 앞으로 가기만 하면 어둠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의심하면 안 되었다. 신뢰하는 마음으로 현실을 벗어나고자 페달을 밟아야 했다. 맞은편 도로에서 달려오는 자동차 불빛이라도 보이면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러나 차와 차의 만남은 순간이었고 마주 오던 차는 다시 돌아올 기미 없이, 인정사정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니 액셀에 힘을 주게 되어 발등이 조여왔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기압 때문에 귀가 먹먹해지더니 자동차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 아, 무서웠다. 어둠에서 뻗어 나오는 공포로 심장이 요동쳤다.

살다 보면 사는 일도 습관이 되어 버린다.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어제였던 삶에서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잠식될 때가 있다. 잠시 감상에 젖다가도 현실감을 잃은 사람 같아서 기대하는 마음을 차곡차곡 접는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자신이나 타인을 옥죄는 망상이라는 생각으로 치닫게 되면 마음에 버캐가 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면, 그다음은, 그러니까….

해발 팔백 미터 지점에 오니 ‘여기는 도마령 고개입니다’ 팻말이 보였다. 전조등으로 보이는 안내판이 표정을 숨길 수 없는 얼굴처럼 보였다. 내가 이렇게 높은 곳까지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 어둠에 나 혼자서. 그런데 슬슬 두려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이구나, 생각하니 아무리 높은 곳이라 해도, 알 수 없는 미래라 해도 앞으로 가면 된다는 단순한 논리가 안정감으로 다가왔다. 높은 고개에서 바라다본 세상이 한낮의 풍경이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왔을까. 아니면 마른 나뭇잎마저 떨어진 앙상한 나무에서 허무에 유폐된 인생을 더 느꼈을까. 전조등 불빛만 보고 올라왔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산꼭대기에 이른 다음에는 다른 선택이 없으니, 내려가는 수밖에.

먹먹해졌던 귀는 점점 괜찮아졌다. 꼬불거리는 산길은 올라올 때보다는 한결 수월했고 겁먹었던 마음도 나아졌다. 깜깜한 산길이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나의 미래도 맥이 없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나무가 죽은 것이 아니듯이, 패배감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니 죽고 싶을 정도로 아프고 슬픈 현실도 오래 지체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서름했던 생각들이 고개를 넘으면서 한결 순해졌다.

처음으로 홀로 돌아올 날이 정해지지 않은 떠남에서 지금이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나무의 말 없는 미소처럼, 앙상한 가지만 있더라도 싹을 위해 뿌리가 쉬지 않고 땅속 물을 빨아들이는 사실이 돌올하게 떠올랐다. 내 삶도 미래를 향해 가고 있으며 도마령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었다. 여행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날들을 믿게 해 주었다. 어느 누구 말보다 마침맞은 명토였다. 여행이 주는 울림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현실을 찾아가는 길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돌아와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물굽이처럼 종종 헤매겠지만, 구원도 나락도 없는 삶은 유연해질 것이다. 집요한 일상에 그악스럽게 잡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