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리뷰대회 수상
2024년 6월 24일 오전 10시 31분,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가운데 18명이 외국인 노동자다. 불이 난 공장 2층에서 비상구로 가기 위해서는 ID카드를 찍거나 지문을 눌러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 이 문을 통과해야 비상구에 도착하지만, 정규직이 아니면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다. 비정규직 외국인 근로자는 ID카드나 등록된 지문이 없기 때문이다. 대피할 수 있는 37초의 시간이 있었지만, 대피할 수 없었다. (2024, 8, 23. MBC 뉴스에서)
‘우리’는 집단과 집단의 경계에서 ‘나’가 속한 집단이 부서질까 봐 노심초사한다. ‘나’가 속한 ‘우리’가 안전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이런 바람이 ‘그들’을 차단하고 차별한다. 그렇다면, 차별하는 ‘우리’에 속한 ‘나’는 평등한 대우를 받는 인간일까. 불리는 호칭으로, 사는 장소로, 공간 출입 가능으로, 싫은 표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신분을 나타내는 계급사회에서 ‘나’는 어떤 계급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19)는 얼마나 많은 차별의 늪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그런지를 생각하게 한다. 스스로가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선량한 시민을 곳곳에서 만난다는 작가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다. 우리의 차별 감수성은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차별’이라는 불편한 언어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차별하는 사람보다 차별당하는 사람이 많은 이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의 태도를 점검하게 한다.
이분법으로 구별하는 일상은 습관이 되었다.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고 분석하는 것이 인류가 발전하게 된 추동력이지만, 분리하는 방법이 더욱 다양해지면서 구별은 차별이 되어 혐오로 변한다. 자동으로 주어진 힘이 부족한 쪽이 차별을 받는데, 그 억울함이 고약하다. 차별받는 무리는 열등감과 낮은 성취감에 휩싸인다. 성취감이 낮으면 삶의 질이 떨어지고 불행해진다. 불행한 사람은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는 선량한 차별주의자, 시혜주의자, 순수한 봉사자, 의미조차 의미를 두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 있다.
우리는 차별 경계선에서 선택한다. 아마도, 차별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도 가능하지 않다. 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차별하지 않은가. 차별을 경험하고 차별에 따른 역차별을 경험한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차별이 자리 잡을 즈음, 또 다른 차별 이론이 우리의 삶을 휘청이게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면서 그 집단을 자기 정체성 일부로 받아들인다. (66쪽)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개인이 집단의 일원이 되면 안정감을 느낀다. 사회적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속성이다. 점점 개인주의가 견고해질수록 공동체 해체 현상을 우려하지만, 혼자가 공동체에서 갖는 안정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에 폭력을 행사한다.
혼자가 혼자에게 하는 폭력보다 집단이 집단에 가하는 폭력이 훨씬 무섭다는 것을 세계사에서 알 수 있다. 역사란, 독일의 홀로코스트나 일본의 731 부대 마루타처럼, 있었던 일이다. 이 외에도 집단이 집단을 향하는 폭력이 혐오가 되어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집단이 집단을 비하하는 표현에는 개인의 두려움도 있다. 그러나 집단에 속하게 되면 개인이 느끼는 두려움은 가벼워진다. 다문화가 다양한 문화라는 의미보다는 사람(진짜 한국인이 아닌 사람)을 지칭하는 것처럼, 다문화주의 없는 다문화에 대한 차별이 서푸른 일상에서 흔하게 만나는 것처럼.
누군가를 무엇으로 호명하는 것이 권력이지만(95쪽), 경계를 가르는 권력(131쪽)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도 당신을 조롱할 수 있다(97쪽)’는 권력으로 집단에 이름을 부여한다. 이런 현상이 사회에 만연하다는 것은 불행한 사회임이 틀림없다. 차별을 개선하기보다는 차별을 부추긴다면, 세상은 이판사판 공사판이 될 것이다. 양측이 모두 잘못이라는 결론은 무의미하다. “너는 잘했냐?”는 말은 비아냥일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똑같은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차별 없는 세상이 있을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차별을 경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별이 구별되면서 성차별이 시작된다. 부의 척도에 따라 기차나 비행기 좌석, 머무는 병실이나 드나드는 출입문이 다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지기수로 소소하고 작은 차별을 경험한다.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에 따라 우쭐하거나 의기소침함을 경험한다. 어른이 되면서 한 사람을 묘사하는 잣대가 점점 늘어난다. 차별 하나가 사라지면 차별 두 개를 만드는 의식과 언행은 정말 지루하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의식은 차별의 늪에 빠지게 하거나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차별 감수성 지수를 매 순간 검토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차별의 교차로에 서 있다. 신호등을 무시하면 사고가 난다. 신호등이 바뀌면 걸음을 멈추어야 이유는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차별도 생명에 대한 것이므로 적색 신호에서 멈추어야 한다.
작가는 말한다. 평등은 변화의 두려움을 딛고 온다고, 법이 부당할 수 있다는 의심에서 행하는 시민불복종 의식은 살아있어야 한다고, 세상은 아직 정의롭지 않다고, 그렇기에 소수자와 사회 정의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되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차이는 맥락에 따라 유동적이기에 차이가 차별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 유연하고 올바른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평등하지 않은 사회지만, 평등한 사회를 위해 선량한 차별주의자 의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래야 아리셀 공장 화재로 인한 죽음처럼 억울하고 가슴 아픈 또 다른 죽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