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들 언저리
2024 [월간토마토] 6월 원고
- 나는 고향이라는 어휘가 물고 늘어지는 정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진화할 수 없는 비논리성이 그 정한의 바탕을 이루는 듯싶다. (『바다의 기별』김훈 / 생각의 나무, 2008)
작가 김훈은 고향이나 타향이라는 어휘가 아예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고향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태어난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마음 깊이 여러 기억과 감성이 스며있어 그립고 정든 곳이 고향이고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장소가 고향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데 작가는 아예, 고향도 없고 타향도 없는 세상을 이야기했다. 비논리적이고 진화할 수 없는 감성이 고향 타령이라며 고향이라는 정서에 대한 편견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는 지역을 이념으로 나누거나 출신으로 무엇이든 구별하려 드는 이의 저열함을 말하기 위해 강한 어휘를 선택했다.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정서이며 자기 삶에 바탕을 이룬다. 특히 태어난 곳에 대한 정서가 유별한 것이 일반적이다. 이 일반적인 정서가 사람마다 비슷하면서 다르다. 자기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독특한 의미로 다가오는 여러 가지 감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장소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이 부려졌던 곳이기에 특별하다. 고향이나 타향이 관계의 동질감이나 이질감으로 이어지는 장소로 기억되기보다는 연속된 삶이 이루어진 곳이기에 그렇지 싶다. 고향은 가능성으로 활기차고 동력을 상실한 열패감으로 흐느적거리는 삶의 뿌리이며 세포이기에 현재와 분리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형성된 의식으로 지금을 살아간다.
고향은 내가 살아온 곳 중에서 처음으로 감각했던 곳이다. 그때 여러 감각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감각이 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양분이 되어 고향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고향이 마치 박물관에 고이 모셔두고 해설사 설명을 들어야 하는 유물은 아니다. 고향이 어딘가에 보관해 두었다 꺼내 보는 골동품이 아닌 것처럼 타향도 귀중한 골동품을 닮은 유사품은 아니다. 이것이 지금 사는 곳, 고향도 타향도 아닌, 내가 존재하는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이유다.
내가 사는 곳은 대전이다. 태어난 곳은 아니다. 이곳에서 강산이 바뀌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공군부대가 있었던 자리였다는데 그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이사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보라매' 공원 이름으로 공군부대 흔적이 남아있을 뿐이다. 내 젊은 날 감수성이 머물던,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보라매공원처럼 누군가의 시절이 머물던 곳이다. 그 후에도 대전은 많이 변했다. 세상이 변한 것처럼.
나에게 대전은 많은 사람과 소소한 일상을 함께 한 도시다. 그들 얼굴이 마음에 몽글몽글한 형체로 다가온다. 쓸쓸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떠나기도 했고 슬프고 애잔한 사연을 싸 들고 이사 오는 이도 있었다.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뒷소리 남기며 떠난 사람도 있었고 감동과 감격으로 잊지 못하는 날들을 기억에 챙겨 떠난 이도 있었다. 이렇게 누군가 떠난 자리에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간혹 비어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했지만 기다리며 빈 시간을 서성였다. 서성이는 시간은 결국 감성과 직관을 헤아리는 날이었다.
계절 깊은 날, 마음 틈 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오만가지 느낌을 글로 쓰고 싶어졌다. 대전 곳곳을 기웃했던 이야기와 그 언저리에서 바스락대던 일들, 그리고 눈이 마주쳤던 사람들의 어쩌면 비밀스러운 이야기일지라도 그 이야기를 소문내고 싶어졌다. 이 모든 것이 필연적 인연으로 미화된다고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낱말을 사용해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어서 한 편 글이 되는 과정에 내 삶을 녹여내고 싶어졌다. 그 삶 언저리에서 함께 한 날들이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 내 삶이라는 궤적이라면 기꺼이 따뜻한 마음으로 반응하고 싶어졌다.
내가 태어난 곳과 태어나지 않은 곳에서 살아온 삶이 당연성과 의외성으로 지금을 존재하게 한다. 다양한 장소는 풍요다. 풍요는 진화하는 삶이요, 진화는 발달이며 좋은 변화다. 변화하는 삶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머금고 산다는 것은 예전 속도와 다른 그 무엇으로 산다는 것이 아닐까. 그 무엇은 무심하기도 호방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순수하기도 한 마음일 것이다. 그 마음은 새로운 장소에서 오는 생경함과 동화되는 가치관이리라.
이민 가게 된 이웃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곳을 한 번씩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을 때, 뭉클했다. 열 살이었던 옆집 아이가 다섯 살 때 살았던 집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눈시울이 뜨거웠다. 지금, 그 아이는 이십 대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청년 시절을 보내고 있는 그는 아마도, 다섯 살 때 기억이 자기 시원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대전에서 태어나 지금은 다른 곳에서 살고 있지만, 또 어떤 곳에서 미래라는 삶을 엮어 나갈지 모를 일이다. 아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삶이라는 유전자로 늘 따라다니겠지만, 고향에 매여 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기가 살아온 삶과 연결된 장소가 있다. 그 어떤 곳에서 옛날을 생각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마음은 비슷하지 않을까. 뼈가 저릿저릿한, 자기가 누구인지를 부정할 수 없는, 가슴 같은 곳에 콕 박힌 결정체. 그것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닌 마음에 자리한 굳은살 같은 그리움이 아닐까.
고향이나 타향으로 다가오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이 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장소임을 말하고 싶다. 언젠가 다른 곳으로 떠난다고 해도 이곳에서 형성된 자아는 그림자 되어 다양한 문양으로 남을 것이다. 태어난 곳과 살아온 곳에서 형성되었고 지금 사는 곳에서 형성되는 정서가 내 몸 혈관처럼, 마음으로 흐르기에 연속된 그림자로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