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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딧 Dec 10. 2020

의료디자인에 적용한 인간 중심 디자인의 가치

디자인으로 기생충을 퇴치할 수 있을까 (2)

우리 팀에서는 기생충 관련 질병을 진단하는 기구를 만들고 있다.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현미경의 기능을 갖춘 기구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기존의 현미경과 차별화되는 점은 이 기구로 환자가 있는 곳에서 바로 (Point-of-Care) 검사, 진단 가능할 수 있도록, 그 사용 방법이 간단하고 배우기 쉽도록, 그리고 생산 가격과 검사 비용이 최대한 적게 들도록 한다는 것이다.


나이지리아에서 유저 테스팅을 한 말라리아 진단 기기


여러 분야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프로젝트인 만큼 우리 팀에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 '현미경'을 다루는 광학 관련 전문가부터 시작해서 '진단'을 다루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전문가, '의료시스템'을 다루는 헬스케어 전문가, '기생충'을 다루는 기생충학 전문가, '커뮤니티'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아프리카 지역 전문가... 마지막으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디자인 전문가까지. 서로 다른 분야에서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효율적으로 함께 일하는 방법을 찾아 맞추어 가는 것도 하나의 큰 여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글에서 소개한 시스템 매핑은 효과적인 툴이었다. 모두가 큰 그림을 그리는데 참여하며 자신의 지식, 경험을 나눌 수 있었으며 공동의 목표를 그려 나가기에도 유용한 과정이었다.

협력기관 중 하나인 라고스 대학교 연구실에서

 


우리 팀에 디자이너는 나와 나의 보스인 교수님 두 명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교수라는 직책도 없고, 경험도 그다지 많지 않은 나는 초반부터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까 고민이 많았었다. 다들 자기 영역이 확실해 보이는데, 나는 내 영역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고 내 역할은 뭘까 싶었다. 그래서 내 존재감을 뚜렷하게 만들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하고, 이런저런 시도도 해보며 헤매기도 참 많이 헤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내가 '디자인' 배경을 갖고 있기에 할 수 있었던 역할이 분명히 있었다.

우리 제품의 주 사용처가 될 약국

첫 번째, 디자이너는 디자인하려는 대상, 사람들과 그 환경에 깊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제품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환경과 상황, 콘텍스트를 넓게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심도 있는 이해가 가능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용자들과 깊이 공감한다. 나이지리아 커뮤니티에서 우리는 의료종사자뿐만 아니라 추후에 우리 제품을 사용하게 될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인터뷰했다. 그리고 질병, 진단과정에 관한 것뿐 아니라 매일의 삶에 관해 물었다.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고, 생활 반경이 어떠한지, 어떤 일을 하며 누구와 소통하는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우리가 디자인하고자 하는 환경을 이해했고, 시각화하여 다른 팀원들에게 공유할 수 있었다.

시각화된 자료들로 인터뷰를 퍼실리테이트 했다

두 번째는 우리가 풀 수 있는 범위 내의 그리고 의미 있는 문제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처음, 우리가 제품을 구상했을 때는 사실 사용자가 누구인지 어떤 환경에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이 없었다. 그리고 커뮤니티를 방문해 조사해본 결과, 어느 정도 사용자 그룹에 윤곽이 잡혔다. 사용자 그룹은 진단 기기에 익숙지 않은 의료 종사인, 그중에서도 약사와 드럭스토어를 중점적으로 잡았다. 우리 제품은 인공지능으로 진단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알고리즘을 개발 중이었다. 그리고 현지에서 사람들과 대면해본 결과, 실제 사용자들은 '인공지능'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새로운 개념이기도 하고, 기계에 의존하는 것 자체에 불신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기계 바깥에서 사람이 작동해야 하는 부분들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 제품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려면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 결과, 기술 개발과는 별개로 사용성, 사용자 경험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했고 초기부터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바단 대학교에서 진행한 코 디자인 워크숍


셋째, 함께 디자인할 수 있는 “판”을 깔고 협업 과정을 “퍼실리테이트”한다. 함께 일하면서도 각자 분야가 다르니 자신의 관점에서만 생각할 때가 많았다. 이때, 디자이너의 역할이 유용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함께 동등한 위치에서 고민할 수 있는 주제를 던지며 판을 까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결정을 함께 내릴 수 있도록 계속해서 참여를 유도했다. 일례로 협력기관 중 하나인 이바단 대학교에서 현지 대학원생들과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대학원생들은 공공의료 전공으로 우리가 연구하는 질병과 정부 정책에 대해 전문가였다. 하지만, 우리의 연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이니, 다들 조심스러워하며 의견을 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우리가 인사이트를 얻고 싶은 부분을 세분화해서 2-3시간 안에 하나의 디자인을 만들도록 워크숍을 디자인했다. 그 결과물 자체보다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좋은 인사이트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특정 요소를 디자인할 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 점이 도출된 것인지, 그리고 그중 우선순위는 어떻게 매겼는지, 그리고 추후 디자인의 영향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등. 이렇게 그 과정을 함께 유도해가며 협력하고 그 중간에서 또 인사이트를 얻는 것이 매우 유용했다.



셋째, 예상치 못한 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디자이너들은 빠르게 실패하고 수정하고, 다시 시도하는 것에 익숙하다. 선택지를 하나만 두지 않고 플랜 B를 만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위기 상황이 있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다른 대안책을 신속하게 꾸릴 수 있었다. 꼭 디자인이라는 분야기에, 할 수 있는 역할은 아니었지만, 보다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나이지리아 이바단의 커뮤니티 번화가

기생충 병을 진단하는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었다. 고려해야 할 시스템, 스테이크홀더, 최종 사용자, 사용 환경...  무엇하나 딱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써 내 역할을 시험해보고 디자인 과정을 겪어본 것은 나에게 뼈와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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