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조금만 천천히
그저 조금만 천천히
이번 역에서는 조금 오래 정차하겠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떠돌았던 탓일까(여행뿐만 아니라 나는 19살 때부터 본가에서 나와 짧게는 3달, 반년, 4년 그리고 또 몇 해를 거처를 옮겨가며 살았다) 언젠가부터 안정적인, 늘 그 자리에 있는 삶에 대한 욕심이 날로 커져갔다. 이제는 새로운 곳에 대한 궁금증이나 갈망보다 돌아갈 곳이 있는 내 집, 내 방, 나만의 공간에 대한 동경이, 더불어 경제 활동의 목표가 떠남에서 지냄으로 바뀌어 갔다.
19살, 당시의 나는 체육대학에 꿈이 있었는데 동네에 입시학원이 없었다. 때문에 오직 입시를 위해 성남의 어느 작은 동네에 반지하 집을 얻어 지냈고, 그것이 나의 첫 출가였다. 수능이 끝난 12월부터 실기가 모두 끝나는 2월 초까지, 약 3개월가량 학원 동기들과 담당 선생님이 함께 먹고 운동하고, 먹고 자는 일종의 합숙 개념이었다. 가구 하나 없이 열 평 남짓되는 공간에 오직 '잠' 만을 위해 머물렀으니 그곳에 있는 내 물건이라곤 할머니가 싸준 밑반찬 몇 개와 샴푸 그리고 냄새나는 운동복이 전부였다.
그러한 수고(?)와 입시의 결과는 비례하지 않았고, 나는 보란 듯이 대학에서 낙방했다. 그리고 곧이어 재수를 위해 이번에는 수원에 있는 이모할아버지 댁에 머무르게 되었고, 할아버지는 기꺼이 방을 내게 내어주셨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발악과 나태가 공존했으며 지난해와 달리 그 집에는 꽤나 멀쩡한 옷가지들과 세면도구, 그리고 수북이 쌓인 참고서가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애석하게도 나는 두 번의 입시 실패로 인한 강제 취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고3의 마무리를 함께 했던 경기도 분당이었다. 고작 22살이 감당하기에 분당에서의 자취 비용은 터무니없었고, 결국 할머니의 빽으로 막내 고모가 세 명의 딸내미와 한 마리의 강아지와 살고 있는 서울 강동구로 이사하게 되었다. 막내 고모의 집은 우리 집안사람들이 대학이니 취업이니 하며 한 번씩 거쳐가는 하숙집(?)과 같은데 나는 생각보다 그 집에서 지내는 기간이 꽤 길어졌다. 두 번의 유럽 여행과 한 번의 자전거 일주, 그리고 첫 번째 독립 서적 출간이 있을 때까지 나는 그곳에서 지냈다. 때문에 나의 물건과 흔적 또한 이 전의 집과는 달리 꽤나 방대해졌다.
늘어나는 짐에 따라 그 공간에 대한 나의 애착도 함께 진해졌는데, 나의 출가(?) 경력중 가장 오랜 기억과 많은 짐을 가진 서울 고모집에서의 생활 역시 머지않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로 하여금 끝이 났다. 나는 좀처럼 이사에 대해 큰 미련이 없는 편인데, 고모네 하숙 생활을 마무리 할 때에는 느낌이 이상했다. 왜인지 이동네에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 같고, 내 서울 생활이 끝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캐나다에서의 삶은 나만의 공간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 시작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제공되었던 침대와 책걸상 등을 제외한 모든 것은 나의 취향대로 꾸밀 수 있었다. 그렇게 '일시적 나의 방'에는 직접 찍은 사진과 세계지도, 목표가 적힌 메시지 등이 벽을 가득 채웠고 책상 위에는 내 입맛에 딱맞는 향긋한 보드카 네 병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다.
그 후로 또다시 약 1년가량 호스텔을 전전하며 떠돌고 나니, 내게는 늘 그대로 있는 물건의 위치에 대한 집착과 강박 그리고 심하지 않은 청소 결벽이 생겨났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세 달 가량 머물던 여행지에서 나의 짐 가지가 늘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과 제자리를 꿰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는 그것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느꼈던 모양이다.
긴 방랑을 잠시 멈추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지금의 나의 동거인이자 은인인 선주의 집에 거진 쳐들어가다시피 하여 그녀와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녀의 집에는 오랜 자취생활로 인한 나름의 룰(?)이 있었고, 불청객인 나는 그 룰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내려두는 곳이 곧 그 물건의 위치인 그녀의 삶의 방식에 설상가상 삼식이라는 이름의 아주 귀여운 털 뭉치 동거묘까지 늘어 나의 '이 물건은 이 자리에' 강박과 나의 청소 결벽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다름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빼앗긴 동거인의 혼자만의 시간과 나의 결벽에 대한 억압은 다행히 볼장 다 본 두 친구의 절교로 이어지지 않았고, 우리는 어느덧 7평 남짓한 원룸에서 약 3년이란 시간이나 함께 살았다. 이런저런 애로사항(?)은 생각보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살면서 한 번도 소리 내어 다툰 적이 없었고 나름의 정해진 역할이 있었으며, 그 역할에 충실했다. 이 곳에는 19살에 집에서 처음 나와 지냈던 그 어떤 공간보다 나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있으며 내 선택의 결과물 또한 곳곳에 배어 있으니 어쩌면 내게는 가장 의미 있는 곳일지 모른다.
언젠가 우리는 조금 더 넓은 집에 살기로 했다. 머지않은 미래이길 바라는 그 집에는 방을 하나에서 두 개로 늘리고, 거실에는 게임기와 소파를 그리고 털 뭉치 동거묘를 위한 캣타워를 두기로 했다. 아마 나의 방에는 글을 쓰기 위한 랩탑과 책상이, 그녀의 방에는 턴테이블과 진공관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방랑을 영원히 멈추는 것은 나의 운명은 거스르는 일이오, 그저 숱한 역을 지나온 나의 공간 열차가 그저 이번 역에서는 조금 오래, 정차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