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통 Jul 12. 2023

시끌벅적한 성장통

- <노인과 바다>를 읽고


제발 한 번 더 방향을 틀어. 냄새를 한번 맡아 봐. 먹음직스럽지 않아? 이제 그걸 먹어 버려. 단단하고 차갑고 맛이 좋은 다랑어도 있단 말이야. 소심하게 굴지 마. 어서 먹으라고. - 40P.


“나쁘지 않아.” 그는 말했다. “고통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 83P.


물고기의 몸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노인은 더 이상 고기를 보고 싶지 않았다. 고기가 공격당했을 때, 마치 자신이 공격당한 느낌이었다. - 101P.


#노인과바다 #어니스트헤밍웨이 #소설 #고전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금 양심에 찔리는 편이다. 안 읽었는데 쉽게 떠벌이는 편이라서. 어쨌든 청소를 하다가 몇 년 전에 사둔 열린책들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의 포장을 드디어 뜯으며 읽게 되었다. 왜 노인과 바다를 먼저 집게 되었는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가장 제목은 익숙한데 안 읽은 소설이어서 그럴 것 같다.


어쨌든 ‘노인과 바다’나 ‘헤밍웨이’를 떠올릴 때 마초, 남성적 문체라고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정말 정신없었다. 진중한 남자라기보다는 정말, 쿨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말이 굉장히 많았다고 할까. 예전에 읽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생각나기도 했다. 물론 <노인과 바다>가 더 오래되긴 했다.


<노인과 바다>에 대한 이미지는 보통 대가리만 남은 생선을 들고 허탈함을 느끼는 노인이라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정작 읽고 나니 그 생선 대가리를 건지기 위한 그 노력과 정신없음이 너무나도 처절하다기보다는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어르신들이 무언가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공경하고 멋져보이지 않나. 그런 느낌으로.


중간부터 노인과 물고기가 동일시되는 부분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어찌 보면 생선의 몸이 다 뜯기고 머리가 남은 건, 노인의 몸이 노쇠하여도 정신은 또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신만 남았을까, 아니 아름다운 꼬리도 남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흔적을 남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 스포일러였나?


어획에 실패하고, 몸을 혹사했지만 노인은 또 바다에 나갈 것이다. 본인 말마따나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101P)’을테니까. 어찌보면 언행일치가 그놈의 마초성을 보인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가 어느 정도 좌절을 하고 있(싶)을 때, 그를 도와주는 것은 자신이 가져온 흔적(꼬리와 머리)가 아닌, 젊은 소년이다.


바다를 남성형이 아닌 여성형으로 생각한 노인은 결국 젊은 소년에게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전달해주면서 결국 또 다른 자신을 투영해낼 것이다. 더 나은 소년(자신)이길 바라면서. 그렇다면 노인은 소년에게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영화로 따지면 우여곡절 끝에 성장하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처럼. 조금 단순히 보면 ‘노인’과 ‘바다’는 성장과 훈육을 맡는 부모님과도 같지 않나. 양육자도 성장을 해나가는 것이니까.


너무 큰 좌절이 닥치진 않길 바란다. 적어도 일어날 수는 있게.


출근도 일어나야 할 수 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개미의 하루 마무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