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을 넘어 이어짐까지 - <밝은 밤>을 읽고
읽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 14P.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134P.
힘들게 버티던 곳이었는데도, 언제든 떠나기만을 바라던 곳이었는데도 나는 할머니보다 이 헤어짐을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 321P.
#밝은밤 #최은영 #한국 #소설
최은영 작가를 좋아한다고 동네방네 말을 하고 다닌다. 소설을 읽고 감동한 경우는 정말 오랜만이라고 말하면서, 단편과 중편이 정말 좋다고. 그렇기에 장편을 기대하고, 출간 당시에 예약구매까지 신청해두었는데. 책장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내버려 뒀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신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가 나왔고 이번에도 예약구매에 아무 생가 없이 강연까지 신청해버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감정이 들어, 심야책방(북티크)에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단숨에 읽을 만큼 재밌지만, 최은영 작가의 글이 워낙 감성을 잘 건드리기에 T형 인간인 나는 약간 피곤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단편에서의 짤막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건 장편이니까. 그렇다고 별로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의 몰입감을 주었다.
증조모부터 ‘나’ 지연까지 다가오기까지, 무려 4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일제부터 현재까지 다가오는 이야기의 시간대는 길지만, 거리가 멀게 느껴지진 않는다. 하나의 공동체이기도 한 가족. 그리고 현재를 사는 ‘나’가 듣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서사는 가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의 서사이기도 했다.
불효자라서 가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여성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감정이 움직였던 이유 중 하나는, ‘우리 가족’을 생각해보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이야기도 많기에.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런 이야기를 더 들을 기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쯤 잘 할 수 있을까.
안 좋은 의미로 공감이 너무나 잘 됐던 순간은, 가족끼리 ‘막말’을 하는 순간들 아니었을까,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우리’가 너무 단단해서, 몇 번이고 말을 참는 순간들. 속 시원하다 싶은 순간도 있지만, 묘하게 급발진 같다는 느낌이 오히려 더 현실에서 자주 보던 모습이 아니었을까.
최은영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을 나는 ‘헤어짐의 순간’을 정말 정밀하게 묘사하고,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만큼은, ‘헤어짐’을 읽기보다는 ‘이어짐’의 순간들을 더 많이 보았던 것 같다. 물론 소설에서도 헤어짐의 순간들이 나오지만, 이어지는 순간들은 조금 더 밝고 희망적이다. 헤어지고 나서의 허탈함과 그럼에도 빛나던 이야기를 넘어, 다시 만나는 ‘우리’의 이야기.
밝은 밤이라기보다는 따뜻한 밤에 가까운 이 이야기는 읽기 전 피곤에 찌들었던 나를 조금 더 노곤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런 고된 이야기는 언제든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작품을 조만간 읽겠지만, 어떠한 이야기로 다가올지 너무 궁금해져서 검색도 안 해보고 있다. 그 책을 읽는 날에도, 따뜻한 밤이, 밝은 밤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