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지상에 정지한 쇠공일 뿐이다. 매우 묵직하고 구심적인 쇠공이다. 나의 사념은 그 안에 단단히 갇혀 있다. 겉보기는 볼품없지만 중량만은 충분히 갖추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힘껏 밀어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 230P.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 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452P.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 681P.
중년의 남자, 특별한 세계(사건), 현실로의 복귀. 참으로 하루키스럽고 뻔하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자리(북티크)에서 두께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다 읽을 수 있었다. 하루키니까. 어떤 관념을 들고 왔을지 궁금하니까.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니 약 5년 만에 하루키 장편소설을 읽는 셈이었다.
스토리플롯이 비슷하다고 까이기도 하고, 나도 종종 언급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건 재밌고 이야기의 힘이 남다르다. 따지고 보면 이 책의 원류가 되는 이야기가 예전에 나왔다고 하니 최근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1Q84>나 <기사단장 죽이기>보다 먼저 이러한 스토리플룻을 구축해놓은 것 아닐까. 그래봤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수준의 질문이다. 그러니까, 재밌는 질문.
소설은 ‘도시’로 일컬어지는 특별한 장소와 현실을 배경으로 진행이 된다. 하루키의 세계관인만큼 관념이 똘똘히 뭉친 것같은 ‘도시’는 일종의 흑백사진과 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현실은 스펙타클하다. 과거 ‘소녀’를 잊지 못한 ‘나(소년)’는 그녀와 만나기 위해 ‘벽’을 넘고 ‘도시’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나’의 죽어가는 ‘그림자’는 도시가 아닌 현실로 탈출하고자 한다.
하루키의 소설이라면 ‘도시’와 현실이 뒤섞인 이야기를 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이번 소설에는 명확히 구분이 되었다. 각 부의 배경이 아주 명확히 나뉜 만큼, 읽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현실의 비중을 다루는 2부가 본 작품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1/3부는 이야기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담당하는 만큼 여운이 컸다.
도시라는 공간은 환상적이라기보단 몽환에 가까운 장소였다. 자각몽처럼 화려하지 않고, 그냥 아주 보통의 꿈. 하지만 현실과는 다른 이질감을 가지는 곳. 일은 하지만 딱 적당히. 자급자족하는 쳇바퀴와 같은 공간. 다른 의미로 꿈같지 않나? 악몽인지 길몽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는 그런 꿈.
소설 속에서는 도시가 꽤 모호하게 묘사되어서 그렇지만, 어쩌면 ‘도시’가 현실이고, 현실이 여행을 떠나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쳇바퀴 같은 ‘도시’가 훨씬 더 현실적이지 않나. 소설 속 현실이 오히려 더 꿈 같지 않나.
벽조차 불확실하기에, 어떻게 인지하는가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이 책에 대해 질문을 들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소설 속 ‘도시’에서 살 것이냐, 도시를 나와 살 것이냐‘였다. 소설 같은 일이 일어날 일은 전혀 없지만, 꽤 생각해볼 거리 아닌가.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결론은 벽을 넘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해 고민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도시 속에 사는 사람도 있을 거고, 도시 밖에 사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불확실하게.
부끄럽지만, 쓸데없는 과몰입을 좀 했다. 주인공 ‘나’가 현실에서 가지고 있던 직업이 출판유통에서 도서관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도서관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전자)출판유통에서 내가 일을 해서. 오죽했으면 도서관으로 새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장면에서 사서 친구들에게 보내서 ‘멈춰’라고 드립을 치고 있었을까.
애초에 ‘나(소년)’, ‘소녀’의 이름이 익명인 건 모두가 경험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이야기여서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 직업이 이럴 줄이야. 쓸데없지만 집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소설을 읽는데 나에게 가장 큰 ‘벽’이 되지 않았나.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주는 그런 모호하고 불확실한 벽.
추석 간 꽉 막힌 서울에서 읽다가, 본가에 와서 독후감을 쓰는데 산책하다가 뻥 뚫린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노리고 산책한 거긴 하지만. 그런데도 다시 서울로 가려고 하는 걸 보니, 참 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