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를 읽고
그릇은 중고나라에서 책보다 비싸게 팔렸다/이제 누구도 아름답게 여기지 않아/이제 누구도 불쌍하게 생각지 않아/그릇을 훔친 좀도둑으로 볼 뿐이다 - <그릇은 필요 없어 中>
그는/선택을 했다고 한다 그는/죽었다고 한다 그는/작고 마른 사람이었는데 – <부음 4 中>
나는 기도하려/손을 모으지만/모은 손으로 칼을 잡기도/한다 신은 종종 물건을 던지는 것으로 의사표현을/한다 신은 여태 똥오줌을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 칼은 뛰면 안 된다 하는데도 자꾸/뛴다 나는 - <드라마틱 中>
#나는나를사랑해서나를혐오하고 #서효인 #시
처음 간 국제작가축제에서 서효인 시인을 볼 수 있었다. 그때가 딱 <거기에는 없다>를 읽고, 박소란 시인의 <있다>를 읽었을 때라(물론 아직 둘 다 독후감은 안 썼다, 다시 읽을 것), 장소와 관념에 대한 생각 아니 우둘투둘한 덩어리가 좀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세트로 봐도 재밌겠다고 혼자.
서효인 시인이 강연에서 ‘다니는 곳’에서 구체적인 구상을 한다고 했을 때, 그 덩어리들이 조금 가볍게 정리되었다. 왜 이리 많은 장소에서 이야기를 쓰는가, 당연하게 그곳에서 생각한 것이니까. ‘내’가 그곳에 있기 때문. 장소와 더불어 ‘나’의 위치가 중요하다는 것.
그렇게 이번에 읽은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도 역시나 장소가 꽤 강조되는 시집이었다. 초장(시인의 말)부터 말하는,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그는 이야기한다. ‘나’는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 사랑하는 것과 혐오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만큼 읽는 내내 모호했다. 애증이니까. 양가적이니까.
이분법적으로 나눠 보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만큼, 이 양가적인 감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확실치 않기에, 화자(혹은 작가)는 이래도 되나 싶다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쓴다. 에둘러 말하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이야기들은 점점 섞여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섞여간 이야기가 다분히 현실적이다. 종종 자기비하를 취미라고 말(개소리)은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까는 건 나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랑하기에 짓궂게 대하는 모순점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그게 비현실적인 건 아니니까. 참 모호하다.
왜 또 모호했을까, 아마 화자들의 어투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시의 문장이야 대부분 온점으로 끝나는 법이 없지만, 연을 넘나들며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는 완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려고 하는 것 같은 힘을 준다. 그 이야기들은 사랑스럽기에 계속됐으면 하기도하고, 혐오스럽기에 끝났으면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사랑과 혐오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물론 이것도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사랑하고 반성하면서 다듬어 가고 싶다.
책 제목을 반대 의미로 읽어 보면서 다른 관점을 찾아보는 것도 재밌는데, 이 문장형을 보다가, 왜 아무 생각도 못 했나 모르겠다. 정말 단순히 ‘너를 사랑해서 너를 혐오하고’로 돌려볼 수도 있을 텐데. ‘나’한테만 집중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를 ‘너’로 볼만큼 거리도 둬야 할 것 같기도 한데, 이것도 좀 이기적인가, 모르겠다.
여담으로 당시 최은영 소설가의 사인을 받으러 간 사이, 서효인 시인은 이미 가버렸다는 걸 듣고 좀 묘했다. 줄이 따로 거기에 있었다니, 책 두 권이나 샀는데. 다음에는 꼭 볼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