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
'하나의 유령이 한국영화사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한 영화가 한국 영화사에 명확히 이름을 새겼다. 이 영화는 지난 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사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지위에 오르며, 수많은 담론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냈다. 가난과 부, 가족주의, 희극과 비극, 미와 추, 희망과 절망, 가능과 불가능, 계급적인 것과 비계급적인 것까지. 하나의 상징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어떤 사상의 중추에서 추출된 것 같이 느껴졌다. 다시 말해, 그 고귀한 사상의 어떤 표본처럼 <기생충>은 담론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담론의 대부분은 균형이 맞지 않는 저울처럼 한쪽으로 쏠려 있다.
이 영화가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상징'에 관련된 것이다. 영화 해석의 한 방법론으로 화면 안의 '상징적인 것들'을 서사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영화가 중심적으로 다루는 소재 혹은 영화의 미술을 통해 얻은 정보를 서사와 연관된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서술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엔 숨겨진 조건들이 있다. 첫 번째, 영화 내에서 소재가 어떤 서사와 만나 의미를 가질 때 어떤 하나의 특정한 의미로 축약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소재에 대한 사회적 정의 혹은 선입견이 유사하거나 동일하여 쉽게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소재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의미가 곧바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기생충>에서 인디언은 계급적 상징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미국의 역사에서 인디언이라는 무리는 '당연한' 차별 속에 있었다. 압도적인 권력과 힘의 차이 앞에 인디언은 백인에게 굴복, 지배당하거나 종말을 맞이했다. 그러므로 인디언은 두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기생충>에서도 기택은 박사장에게 굴복당한다. 이들의 계급적 격차는 과하리만큼 보장되며 어떤 방법으로도 그 격차를 넘을 수 없다. 빛이 가득한 박사장 네 저택의 마당과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의존하는 기택네 반지하의 거리는 명확한 고도차가 있다. 그리고 영화가 대응시키는 가족들의 면모도 얼마나 '전통적'인가? 이런 '전통적' 구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대립을 파악하게 한다. 한 가족에 다른 가족이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히 대립하는 것이다.
이 대립을 갈라놓는 것은 바로 대칭을 만들어 주는 기점, 곧 계급이다. 박사장과 기택, 연교와 충숙은 명확히 대립한다. 이 대립을 극복하는 허상이 초반부를 장식한다. 기택의 가족은 엄청난 기세로 박사장의 집으로 파고든다. 박사장의 집에 있는 가족을 '보필'하는 자리는 기택의 가족들로 채워진다. 이 과정은 일종의 환상극으로서 기능한다. 허술해 보이는 장치들은 계급적 정복의 허상과 재미로 덮이며 채워진다. 익살스러운 인물들이 각자의 재치와 끼를 통해서 박사장 네 집으로 침투하는 장면은 유쾌한 케이퍼 무비의 한 장면 같다. 눈속임과 언변, 겉치레를 통해서 만들어 낸 기택 가족의 허상에 빠져드는 박사장 가족을 보며 관객들은 희열을 느낀다. 이토록 강렬한 대칭점을 이토록 쉽게 허물고 있으니 말이다. 잘 그려진 그림이 다른 한 면으로 가서 자신과 똑같은 무늬를 새겨낸다.
이 데칼코마니가 성공했다고 믿어지는 순간, 장대한 파티가 열린다. 저택으로 파고드는 반지하 가족의 연회가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기택의 가족이 늘어놓은 잔치상은 이전의 고기를 구워 먹던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술의 종류와 안주,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편한 자세로 그 '사치스러운 연회'를 즐기고 있다. 이는 이후 전개되는 다송의 생일잔치와 견주어 볼 때, 더욱 단순히 충족될 수 있는 욕망에 그친다. 현악 사중주도, 수많은 사람의 축복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행복감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하나의 위기가 찾아온다. 이 위기는 불안한 얼음장 위에서 연회를 즐기던 이들에게 다가오는 구체적인 공포이다. 문광이 저택으로 찾아온 것이다.
공포를 통해서 영화는 미묘한 톤의 변화를 거친다. 아직 연회의 즐거움이 식지 않은 상태에서 급습한 공포는 묘한 이질감을 준다. 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을 뚫고, 얼굴에 멍이 든 채, 그 작고 갑갑한 인터폰 안에서 집에 들여보네 달라고 애원하는 문광의 얼굴은 압권이다. 이 미묘한 톤의 변화는 영화가 앞서 만들어 둔 전반부의 그림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앞선 대칭성은 문광의 등장과 함께 요동친다. 저택과 반지하라는 공간은 지하실이라는 변질적인 공간을 마주한다. 지하실은 저택과 반지하가 위치하는 '공개적인 공간'이 아니다. 이 공간은 보이지 않는 공간이고, 은폐된 공간이다. 한낱 빛이 들지도 않는 지하실에는 문광의 남편인 근세가 살아가고 있다.
문광과 근세는 명확한 데칼코마니를 요동치게 만든다. 이들은 기택네보다 앞서 '기생'하는 사람들이다. 더욱이 이들은 박사장네와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이들은 그야말로 그 저택에 기생하는 사람들이다. 문광과 근세, 그리고 기택과 충숙은 일종의 공간적 유사성을 가진 이들이다. 기택네가 사회적 범주 안에서 최하층에 있다면, 문광과 근세는 그보다도 낮은 '외부'에 있다. 그러나 지하실의 충격적인 등장과 달리, 영화는 급격하게 이들을 다루기 쉬운 소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이것은 가난의 전시를 넘어선 가난에 대한 멸시이다.
문광과 근세, 특히 지하실에 사는 근세의 이미지는 유아적이거나 변변찮은 것들로 채워진다. 침대맡에 수북이 쌓인 콘돔, 바나나와 이유식, 박사장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 그리고 지하실에서 음식을 찾으러 오는 근세의 얼굴. 근세는 어떤 의지도, 어떤 힘도, 어떤 능력도 없는 무기력하고 충동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이는 멸시가 동반된 시선이다. 멸시는 근세를 보는 기택의 시선을 통해 명확히 묘사된다. 만사에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는 기택은 근세를 보며 신경이 곤두선다. 기택이 근세를 보는 시선은 마치 박사장이 기택을 보는 시선과 유사하다. 기택은 근세를 다만 자신의 계급적 하층민으로 본다. 이를 통해서 영화는 묘한 요동을 주던 문광과 근세를 다만 기택의 아래를 채우는 보조 도구로 사용하고 만다. 다시 말해, '상징'을 뒤흔들던 근세와 문광은 '상징'적으로 파악되어 버린다.
멸시의 시선은 기택의 입장, 혹은 기택 가족의 일원이 되어 영화를 보고 있던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근세는 기택이 더 이상 무너질 수 없는 하한선이 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가난과 부의 일면을 꼬집으며 대립이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벽이 되었음을 비판하고자 한다. 전반부의 허상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리된다. 기택 가족은 근세 가족을 만나게 된 후, 박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다. 근세의 공간까지 내려가고 싶지 않은 기택은 자신을 근세 보듯 하는 박사장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근세에서 기정으로, 기택에서 박사장으로 이어지는 분노는 억하심정의 뒤틀린 분출이다. 그리고 이 분노는 근세와 문광의 등장에 따라 예정되었다.
'상징'적으로 파악된 근세와 문광은 어떤 역전의 씨앗마저 제거한다. 이 순간 서사는 무기력하게 곤두박질친다. 도저히 박사장네는 알지도 못하던 - 혹은 알 수조차 없는 - '사회 밖의 사회'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가장자리에 있는 기택이다. 이들은 가장자리에 있던 기택이 계급을 횡단하려는 발버둥을 칠 때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근세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으로 포착되고 만다. 이 포착을 통해 근세는 사회의 최저변으로 유입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포용'은 다양한 근세의 얼굴을 지우고 명확한 '그림'을 덧씌운다. 이를 통해 근세는 자신의 상위 계층에 대한 분노를 분출하고 이 분노는 기택에서 박사장으로 이어진다. 그 순간 서사는 요동치지 않고 '상징'에 막혀버린다. 이 구태의연한 태도는 무기력하게 곤두박질친다.
박사장의 죽음과 무관하게, 기우의 복수는 다시 예정된다. 그런데 이 복수는 얼마나 허망한가? 그 호화로운 저택에 들어서는 기우의 얼굴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단언컨대, 그 평화는 실현될 수 없다. 온갖 능력과 잡기, 기회로도 무구한 허상을 돌파하지 못했던 기우가 그렇게 단숨에 벽을 넘을 수 있겠는가? 달리 말해, 기우의 복수는 정상적인 방법이 되겠는가.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의기충천한듯한 기우의 얼굴을 비춘다. 그러나 가득한 기우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 무한한 의지는 하늘에 닿지 못한다. 그 하늘이, 그 벽이 모두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미 계층이 아닌 계급에 가까운 분리가 이루어졌고 그 계급은 데칼코마니의 기준으로만 작동할 뿐이다.
이 기준을 파괴할 수 있는 사회 바깥의 어떤 것들은 영화에서 쉽게 포착되고 만다. 서사의 가능성이 요동치는 그 순간을 이 영화는 이내 상쇄하고 만다. 이러한 침묵을 통해서 반복은 형성되지 않는다. 다시 허상에 대한 도전은 작동하지 않고, 서사는 무기력하게 지하실로 내려앉는다. 계급 전환에 활기를 불어넣던 기택의 가족들은 무기력해진다. 기택은 자신이 채울 자리를 멸시한다. 멸시는 분노로 환원된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감정이 영화에 팽배한다. 이내 한 지점으로 수렴한다.
이러한 양식은 영화의 이야기를 명징하게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서사의 조각들을 파편화시켜 버린다. 조각들은 유기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화에서 비추지 못한다. 문광과 근세를 필두로, 연교와 다혜에 대한 묘사, 충숙과 기정의 서사는 과도하게 축약되고 간략히 드러난다. 결국 서사는 자신의 조각 중에서 일부를 '상징'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조각들을 밀어낸다. 이것은 서사가 자신의 온몸을 바쳐 이루어낸 성과인가? 아니면, 서사가 더 나아갈 길을 스스로 잘라내고서 종언을 선서하는 것인가? 한 영화가 만들어 낸 서사가 한국영화사에 획을 그었다. 이제 이 영화는 하나의 기준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서사의 유령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영화사를 떠돌아 다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