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건
그녀는 자신의 침대 옆에 놓여있던 작은 가방에서 로션을 꺼내어 손등과 팔에 펴발랐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흰 바탕에 빼곡하게 적혀있던 글을 읽어내려갔다.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 안엔 그렇다고 정적이 흐르거나 하진 않았다. 부스럭 거리는 이불 소리와 은하씨의 가방이 열리고 닫히는 지퍼 소리 그리고 나의 타이핑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윤겸씨, 작가였어요?”
그녀는 침대에 앉은채로 넌지시 물어보았다. 타이핑을 하고 있던 나를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재준씨가 코코아를 마신 후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한 부분을 쓰고 있었다. 음, 이것도 글이라면 글인가. 방금 해 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생각나서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씨익 웃었다.
일기에요. 그냥 그날 있었던 일들 적고 있었어요. 기록해두는걸 좋아해서요.
“나도 글쓰는거 좋아하는데.”
그러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이불로 덮고는 벽에 등을 기댄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기쓰는거. 저는 대신 연필로 글쓰는걸 좋아하거든요. 샤프, 볼펜말고 연필로.”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음, 그냥 연필 잡는것도 좋아하고 특히나 종이 위에 사각거리는 소리도 좋고. 왜, 가끔 나무 향 좋은 연필 쓸 때 있잖아요. 그럴 땐 괜히 기분도 좋아지는것 같고 무엇보다 연필로 글 쓸때 내 필체가 좋아요. 다른 것보다 연필로 글을 쓰면 글씨가 예쁘게, 잘 써지거든요.”
그녀의, 그녀 나름의 글쓰기 철학(?)을 듣고는 학창시절에 내가 글쓰기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의 빈 화면에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만들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도 끝끝내 하루를 다 날리도록 완성하지 못했던 글들이 떠올랐다. 노트와 펜으로는 글이 그렇게 잘 써졌는데 이상하게도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정리도 잘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되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곤 했었다.
저도 종이 위에 글 쓰는게 더 좋아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좋아하는 커피 마시면서,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글쓰는게, 가끔은 일상에서의 도피에요. 가끔 카페에 냅킨 위에다 볼펜으로 끄적일 때도 있거든요. 물론 지금처럼 노트북이나 데스크탑 앞에서 하루 종일 글을 썼다가 지웠다가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왜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까요. 작은 종이조각이나 냅킨 위에 펜이나 연필로 끄적거리는게 훨씬 더 낭만적이라서 글이 잘 써지는 걸까요.
“노트북 사용하면서 글쓴다고 낭만이 없다곤 할 수없죠. 지금도 충분히 낭만적으로 보이는데요?”
그리고 그녀는 나의 옆에 켜져있던 오렌지색 개인램프를 턱으로 비죽 가리켰다. 글이 쓰여지는 환경의 차이도 분명히 있다.
그 때마침 해 윤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쓰던 글을 마무리한 후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둔 후 이불을 편평하게 정리했다.
“내일은 어디로 떠나세요들?”
“올레길 걸으러 가려고요. 제가 걷는걸 워낙에 좋아하는 사람이라. 여기만한 곳도 없는 것같아요.”
“윤겸씨는요?”
저는 성산까지 이동해요.
나의 대답에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어요? 엄청 멀어요, 거기까지. 천천히 다니시지, 주변 여행지도 좀 둘러보고.”
일단 5일 내로 완주하는게 목표라서…
“가는 길에 오르막이 많이 심하진 않을테지만… 그래도 쉬엄쉬엄 다녀요. 떠날 날 정해진거 아니라면서요.”
네, 감사해요.
소등시간이 훨씬 넘었고 옆 방에서 쉬고있을 손님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속삭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해 윤 선생님은 침대에 올라 앉아 은하씨와 내게 여행팁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가령 중남미 여행을 할 때엔 영어보다는 스페인어 몇 문장을 외워가는게 좋다는 것과 음식 맛 없기로 유명한 국가에 가면 차라리 숙소에서 음식을 해먹을 것. 그게 싫다면 공원에 앉아 지나가는 여행객이나 현지인을 구경하다가 그들에게 그나마 나은 식당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좋다는, 어쩌면 당연하지만 간과할 수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했다.
12시가 지나서야 문 바로 옆쪽에 위치한 침대에 앉아계시던 해윤 선생님이 스위치를 내렸고 은은한 오렌지 빛 조명만이 방안을 채웠다. 불을 끄고 난 후 그녀들은 금방 잠에 빠져들었으나 나는 이불 속에서 이동 거리와 그 길에 볼만한 여행지를 확인하다가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스르르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조식으로는 식빵과 달걀프라이, 딸기잼과 우유, 물이 나왔다. 캐주얼한 게스트하우스의 전형적인 조식이었다.
“일찍 일어났네요?”
아침 8시에는 적어도 출발을 해야해서요.
“성산까지 가셔야한대.”
해윤 선생님께서는 아직까지 방에 계셨는데 나는 아무래도 밥을 먹고 바로 게스트하우스를 빠져나가야 할 것같아 인사를 미리하고 나왔다. 어제 은하씨, 재준씨와 함께 짜장라면을 먹었던 그 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차를 렌트했으면 좋았을텐데요.”
그런데 제가 면허가 없어서요.
“저런.”
재준씨는 내 대답을 안타까워 했지만 금새 표정을 풀고 밝게 웃으면서 ‘화이팅’을 외쳤다. 아침식사 자리에서 힘을 받으라며 달걀을 먹다말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던 두 손으로 기를 전해주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지만 눈까지 꼭 감고 마치 온 에너지를 전달해주려는 그가 한편으로는 고마워서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짐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자전거 뒷좌석에 고정시키려는데 분명 처음과 같은 양임에도 왜인지 더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자전거의 상태를 확인하는데 두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오늘 비가 온다고 하던데.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
재준씨가 말했다.
날이 어둡긴 하네요.
은하씨는 한 쪽 손에 들고있던 작은 비닐봉지를 내게 건네었다.
“이거 짐일테지만 그래도 쉴 때 까먹으면 좋을거같아서.”
아이구,
귤이 들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언제든지 다시 와요! 저도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지 모르겠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재준씨는 개구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 모양으로만 ‘나도’라고 했다.
또 올게요.
자전거에 올랐다. 패달과 땅을 동시에 힘차게 밟아 출발했다. 하늘이 흐렸지만 마음은 맑았다. 자전거 손잡이에 걸어둔 귤봉지가 흔들릴 때마다 입가엔 미소가 번져갔다.
게스트하우스는 만남과 헤어짐의 장소이다. 마치 인생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