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스페인어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며칠간은 시험을 위한 스페인어 공부는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 한국에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았구나, 싶어서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이틀 전에 말하기 시험을 먼저 봤다.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네 영역 중에 말하기 영역을 가장 걱정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읽기 영역을 제일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싶을 정도로 독해가 어려웠고 되려 말하기 영역에서 선방한 느낌이 들었다. 시험을 보고 그날 저녁에 조카가 보고 싶어 한국에 있는 언니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쫑알쫑알 예쁘게 말하는 조카에게 나는 올해 몇 살이냐는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조카는 오른 손가락 5개와 왼 손 엄지손가락 한 개를 펼침과 동시에 '여섯 살이에요.'라며 빙긋 눈웃음을 보였다. 그런 조카의 모습을 보니 나 또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언니네 가족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언제나처럼 형부는 나를 아주 아-주 많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물론 문장 그대로 내가 한국에 들어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겠지만 동시에 내가 얼른 그들의 집에 들러 첫째 조카와 최근에 태어난 5개월 된 둘째 조카를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임을 알고 있다.
솔직히 6년 전부터 나는 이런 말을 첫 조카가 태어남과 동시에 들어왔던 것이다. 대학생이었던 내가 종종 언니네 집에 놀러를 가면 조카를 봐주고 언니를 도와주었는데 솔직히, 나는 그게 싫었다. 한 번은 엄마와 형부, 언니가 본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마치 내가 물건인양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싫다는 나를 억지로 데려가 며칠을 보모처럼 살게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당시엔 그들이 내 의사를 묻지 않았던 것보다도 나를 무시하고 본인들끼리 결정하는 그 모든 순간들이 기분이 더럽고 짜증 나서 그 날 이후로 언니네 가족이 더욱 미웠었다. 말도 안 되게 어디론가 팔려가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으니까. 이번에 통화를 하면서도 조카를 돌봐달라는, 그런 똑같은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인상을 쓰지 않았다.
맛있는 거 얻어먹으러 갈게요!
생각해보니 이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기분 좋게 그들에게 말을 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 말을 듣고 형부는 '우리 처제가 많이 컸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여기서 더 크면 큰일 난다'며 내 키 얘기로 이야기 내용을 다르게 받아들인 양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싫다는 말을 바로 했을 것이다, 직설적이고 매우 짜증스럽게. 아니면 우물쭈물거리며 싫은 내색을 표정으로 팍팍 표출했거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자존감이 낮았던 나는 그들에게 예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래서 놀랐고 그래서 나 또한 기분이 좋았다.
이 곳에서 나는 내 과거와의 조우를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이었고, 나는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일 것인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면서 내면에 가득 차 있던 악한 감정과 미움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솔직히 이 곳에서 살면서 현지 사람들과 소통은 많이 하지 않았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만큼 나와의 대화를 많이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면서 스스로를 치유하려 했고 가족들을 혼자 용서했고 과거의 친구였던 그들을 용서했다. 생각보다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강해졌고 그와 동시에 눈물을 참을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해나가면서 나는 많이 성장했다, 누군가의 셋째 딸, 누군가의 꿈을 대신 사는 사람이 아닌, 나, 나 스스로 내 삶을 꿈꾸고 개척하는 것으로... 내 안에 자라지 못하고 있던 어린 내가, 많이 부딪히고 견뎌내면서 쑥 자란 것 같다. 20대 중반에도 내 마음은 10대 초반의, 사춘기를 지내고 있었는데 볼리비아에 오고 2년 동안 무럭무럭 자라 20대가 된 것 같다. 이런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칭찬을 듬뿍 해주고 싶다. 더 편안해지고 밝아진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쩌면 곧,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말할 수없었던 모든 일들을 적는 공간인 '하루 에세이'의 완결이 머지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