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공항은 볼리비아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경유지였기 때문에 그래도 한 번 와본 곳이라고 낯설진 않았다. 바라하스 공항에서 아토차역 근처에 있는 숙소까지는 공항버스(5유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기에 공항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길을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마치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28인치 캐리어와 기내 캐리어를 끌고 가는 동양인 여자, 누가 봐도 여행객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당당하게 걸었다.
버스 기사에게 5유로를 건네니 영수증을 준다. 버스에 올라 28인치 캐리어를 보관대에 올리려 하는데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움직이는 버스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들어 올리려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가장 앞좌석에 앉아 있던 어느 친절한 사내가 도와주는 덕분에 캐리어를 보관대에 간신히 올릴 수 있었다.
아토차역까지는 약 30분이 걸렸다. 공항에서 마드리드 시내로 오는 길, 버스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을 달리다 갑자기 큰 빌딩들과 많아지는 차들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게 마드리드는 서울이랑 비슷한 분위기라서 유럽 여행 중 가장 별로인 곳이었다고 했는데 마침 딱, 그 말이 머릿속을 스칠 줄이야. 버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바빠 보였다. 길 위에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행객(인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또한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마드리드는 하룻밤 혹은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마드리드에서의 4박 5일은 너무 긴 시간이 되려나 싶었다.
아토차역에 내린 후, 나는 캐리어 2개의, 8개의 바퀴로 바닥을 가르며 숙소까지 걸어갔다. 바퀴 소리가 내가 걸어가는 것을 온 동네방네 소문내는 바람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혹여나 소매치기가 내 크로스백을 끊어갈까 걱정도 되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게 숙소엔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도착했다.
호텔 메디오디아(Mediodia)는 사람이 오면 자동으로 철제 정문이 열린다. 처음엔 그런 줄도 모르고 ‘오! 이 집 벨보이 열일하네!’하며 문 뒤를 확인해봤는데 사람이 없었다.
체크인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일단 짐을 맡기고 직원에게 주변 추천 음식점과 가볼만한 곳을 추천받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솔 광장, 마요르 광장, 미술관과 공원, 추로스 가게 등등이었지만. 그래서 일단은 호텔에서 나와 솔 광장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점심을 먹으려고 왔더니 아직 문이 닫혀있던 El Sur 맛집, , 마드리드, 2019.10.29.
물론 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지만 딱히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걷기로 했다. 뚜벅이 여행의 좋은 점은 골목골목을 걸어 다니며 예쁜 풍경과 현지인들이 많이 앉아있는 맛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짐을 리셉션에 맡겨두고 숙소에서 나와서 뒷 광장 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광장엔 젊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첼로를 들고 다니는 학생도 보았고 색소폰을 연주하는 친구도 보았다. 알고 보니 숙소 뒤엔 레이나 소피아 박물관과 왕립 음학원이 있었던 것! 다른 지역으로 가기 전에 아무래도 이 광장에 잠시라도 들러 앉아 있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 광장 (Puerta del Sol)에서 , 마드리드, 2019.10.29.
솔 광장에 도착했다. 굉장히 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작아서 더 놀랐다. 별로 볼 게 없네, 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와서 나도 놀랐다. 곰과 산딸기나무 동상도 보았고 말을 타고 있는 동상도 보았는데 0Km 지점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광장 바로 앞에 보이는 오렌지(Orange) 통신사에 들어가 15기가짜리 유심칩을 20유로를 주고 구입했다.
(많은 여행객들이 보다폰(Vodaphone)에서 유심칩을 구입한다. 그래서 나도 보다폰에서 구입하려 했다. 그러다 언젠가 나는 어느 여행객이 유심칩을 두 번 구입했다는 후기를 접했다. 예를 들어 8월 말에 구입한 4주짜리 유심칩이 다음 달인 9월 초부터는 먹통이라 확인해봤더니 ‘8월 한 달, 4주를 쓸 수 있는 유심칩이라 9월부터는 쓸 수 없는 것’이었더라는, 그 후기를 본 후에 월 말에 여행을 가는 내 입장에선 보다폰은 안전한 선택이 아니었다. 따라서 다른 통신사를 알아보다가 오렌지 통신사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유심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여행이 끝난 지금 돌아보면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동영상을 많이 보지 않는 여행객이라면 15기가 유심이면 정말 충분하다. 게다가 와이파이 도시락보다 훨-씬 저렴하다!)
기계로 구입하는 도중에 여권 인식이 잘 되지 않아 직원의 도움을 받아 휴대폰 칩을 바꾼 후에, 나는 이제 어디서든 인터넷을 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매장에서 나왔는데 어느 여자가 설문지를 내밀며 내게 잠시 시간 좀 낼 수 있냐고 묻더랬다. 나는 ‘나 이해 못해, 미안해.’라고 하고 빨리 지나쳐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왠지 소매치기 수법 중 하나겠거니 싶다. 물론 모든 사람들을 소매치기범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2019.10.29, 마드리드, 마요르광장에 들어가는 중
이후에 나는 곧장 마요르 광장으로 걸어갔다. 솔 광장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만날 수 있는 마요르 광장. 사각형 붉은 벽으로 둘러싸인 광장 중앙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다. 사실 붉은 벽을 배경으로 전신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마침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던 영국인 모녀에게 나 또한 부탁을 했다. 감사하게도 사진을 찍어주셨지만 ‘역시, 사진은 한국인이다,’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드는 사진을 찍어주셨더랬다.
산 히네스(San Gines) 추로스 집에서. , 마드리드, 2019.10.29.
붉은 벽 광장을 둘러본 이후 산 히네스 추로스 집으로 바로 갔다. 배가 그렇게 고프진 않았지만 가게가 광장 근처에 있으니 ‘맛집은 얼른 들러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걸어갔다.
초콜릿 장인이 만드는 초코 라테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하며 4.5유로로 길쭉한 추로스 6개와 초코 라테 1컵을 주문해 먹었는데 추로스는 계피가 뿌려지지 않은 튀긴 빵이었고 초코 라테는 많이 달지 않아서 맛이 좋았다. (사실 그 당시엔 추로스 때문에 김치가 먹고 싶었고 한번 먹으면 됐다, 싶었으나 셋째 날에도 마드리드 왕궁으로 가는 길에 산 히네스를 들렀다는 건 안 비밀.)
함께 늙어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마드리드, 2019.10.29.
그렇게 추로스를 먹고 다시 솔 광장으로 돌아와 한번 주변을 슥- 훑고 2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골목골목을 걸으면서 숙소로 내려갔고 가는 길에 큰길로 빠져나왔을 때 발견한 중국인 가족이 운영하는 마트에서 1유로로 1.5리터짜리 물을 구입했다.
숙소에서 체크인을 하면서 300유로가 넘는 금액의 숙박비를 카드로 지불했다. 숙소를 예약하면서 비용을 미리 지불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덕에 가져온 카드 계좌에 여행 예산이 예상보다 더 초과되어 당황스럽다. 이런 일이 앞으로도 또 있을지도 모르니 다시 예산을 확인해야겠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풀고 15시간의 긴 비행에 지친 몸과 기름기에 번들거리는 머리카락을 씻어냈다. 그리고 나선 한국에서 짰던 러프한 여행계획서를 다시 꼼꼼하게 채워나가며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