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 아버지 덕분에 전국 맛집을 돌아다녔고, 아주 가끔 아버지가 해주는 음식도 맛볼 수 있었다. 반면에 엄마는 요리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고 늘 바빠서 질보단 양으로 승부했다. 그래서 집밥에 대한 기대가 낮은 편이다.
아침 일찍 운동하고 식사한 뒤 출근하는 것이 아버지의 오래된 루틴이다. 원래 저녁은 엄마랑 같이 먹곤 했는데, 외출이 잦은 엄마 때문에 요즘엔 주로 혼자 드신다. 매일 사 먹는 것도 지겹고 돈이 많이 든다며 동네 반찬 가게를 발견했단다.
"깍두기가 아삭하고 맛있어. 멸치볶음도 간이 딱 맞고."
반찬가게에서 샀다며 동치미랑 멸치볶음, 깍두기를 챙겨주셨다. 어릴 적부터 자주 먹던 소시지를 굽고 오이랑 파프리카를 적당히 썰어서 곁들인다.
양념이 강한 걸 싫어해서 대부분 음식을 싱겁게 먹는다. 거기다 소식좌라 밥도 반 공기면 충분하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위장인가!
평생 가족이랑 회사일 밖에 모르던 엄마는 갱년기 우울증을 겪으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이제부턴 하고 싶은 것 실컷 하면서 살 거야!'라고 외쳤다. 하지만 오래된 습성을 바꾸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축구하느라 주말이면 집을 비우고 밖에서 사람들과 종종 어울렸던 아버지는 활동량이 줄고, 어머니는 일주일에 서너 번 모임에 참석하거나 손님을 만난다. 심지어 사흘 연속 여행 가는 바람에 아버지 혼자 주말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괜찮단다. 엄마만 안 아프고 행복하다면.
세상 이해심 넓은 아버지 덕분에 엄마는 할 말 다하고 남편 눈치 1도 안 보고 산다. 거기다 밥상을 차려주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완벽한 배우자인가. 가끔씩 조카들이 고향에 오면 픽업하러 가는 것도, 바쁜 엄마 대신 잠시 봐주는 것도 아버지 몫이다.
그래서 난 집밥을 고집하는 남자들이 이해가 안 간다. 각자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인데, 언제까지 집에서 밥 해달라고 칭얼거릴 것인가. 평생 엄마나 아내가 해주는 밥 덕분에 건강하게 지냈다면 남은 생은 알아서 해결하거나고생한 아내를 위해 가끔은 밥상을 차려줘도 되지 않을까.
전업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회사일 하느라 바쁜 아내를 위해 요리를 도맡고 있단다. 아내를 위해 무말랭이 반찬을 만들며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을 받을 상상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