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annie Aug 02. 2022

쉬운 게 하나도 없다

묵묵히 살아내기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미국. 작년 이맘때 들어올 때만 해도 아직 한창 코로나 시국이라 그런지 공항이 텅텅 비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제법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고 공항 내 식당들도 연 곳이 많아, 마치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탑승객이 늘어난 만큼 입국 심사도 줄이 꽤 길었는데, 그래도 1시간 만에 내 차례가 왔으니 생각보다는 빨리 끝났던 것 같다. 입국 심사를 받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확실히 학생비자(F-1)가 심사는 제일 수월하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모든 돈을 대 주고(돈 없어서 불법 체류자로 전락할 가능성 제로) 신분이 보장되니(재학생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내 앞에 줄 선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 목적으로 온 사람들로 보였는데,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간간이 들리는 심사관들과의 대화를 들으니 직업부터 시작해서 한국 어느 지역에 사는지, 최근 어디 방문했는지(본토 방문한 사람에게는 거길 왜 갔으며 누구 만났는지까지 꼬치꼬치 물었는데 나중에는 질문받던 분이 짜증을 낼 정도였다), 여긴 왜 왔고 얼마나 있을 건지 등 자질구레한 질문들을 묻느라 한 명당 거의 10~15분은 족히 걸렸던 것 같다. 나는 차례가 되어 여권과 I-20 서류를 건네자마자 심사관이 혼자 왔냐고 묻더니 몇 가지 묻지도 않고 금방 끝났다.


- 심사관: 학생이에요?

- 나: 네.

- 심사관: 수하물 안에 음식 있어요?

- 나: 햇반 2개 있습니다.

- 심사관: 그게 다예요? 오케이. 현금은 얼마나 갖고 왔어요?

- 나: 10달러요 (대부분 카드로 결제하다 보니 지갑에 팁 용으로 넣어둔 1불짜리 지폐 10장과 동전이 다였음)

- 심사관: 그게 다예요?

- 나: 네 (....???)

- 심사관: 좋은 하루 보내세요!


오자마자 짐 정리하고, 마트 가서 일용할 양식들을 챙기고, 다시 지난 학기와 같은 루틴을 만들고 나니 일주일이 금세 지나갔다. 가족과 헤어져 한국을 떠날 때는 좀 슬펐는데 막상 또 공부 외엔 할 게 없는(!) 평화로운 이곳으로 돌아오고 나니 확실히 공부하기에는 미국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와 있던 학생들과도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하니 그래도 맨 처음 입학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왔던 초기에 비해 마음이 금방 평온해지고 안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감사한 일이다.




방학 때 편히 쉰 것은 좋았는데 막상 그간 진도를 얼마 나가지 못한 내 연구를 보니 다시 한숨이 나온다. 그렇다고 마냥 논 것은 아닌데, 내가 정한 주제와 실험 방법이 너무 어려워서 한 달간 지지부진한 상태로 끌어온 것이다. 교수님이 보다 못해 자기 제자들 중 제일 똑똑한 선배 학생들 세 명을 붙여서 나와 같이 실험을 짜게끔 도와주셨는데도, 그 세 명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이거 너무 어려운데? 실험 방법 자체도 어려운데 이 주제로 짜려니 진짜 어렵다!"). 직접 만나서 대화하면 금방 끝날 대화인데 셋 다 다른 곳에 있어 이메일로 주고받으려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효율적이지 않았던 탓도 컸다.


첫 번째 소논문 주제도 그저 재밌어서 정한 거였는데 나중에 파고들다 보니 아주 어려운 주제였고, 지금 골치 썩고 있는 이 두 번째 소논문 주제도 그저 이와 관련된 한국 관련 선행 연구가 없길래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주제도 알고 보니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였다. 왜 난 늘 어려운 주제에 끌리는 걸까. 첫 번째 소논문은 그래도 어찌어찌 끌어왔는데, 두 번째 소논문은 정말 한 달 동안 매달려도 영 가시적 성과가 없는 것 같으니 속이 쓰리고 자괴감이 든다.


특히나 교수님이 붙여주신 그 세 명의 학생들이, 그들 말로는 괜찮다고 얼마든지 물어보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엄연히 학생이고 내 지도교수가 아니기에, 매번 그들의 시간과 수고를 앗아오는 느낌이 드니 나도 영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그저께 종일 방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실험을 수정하다가, '와, 나는 이 연구를 하기에는 너무 멍청한 사람 같다. 교수님께 그냥 이거 접겠다고 말씀드려야겠다'라고 큰 마음을 먹고 연락을 드렸다.


- 교수님, 지금까지 완성한 실험 파일을 보내드립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거대하고 어려운 주제 같아요. 괜찮으시면 혹시 금주 중에 면담을 할 수 있을까요?

- 이거 그 세 명한테 다 보여줬니?

- 이거 바로 이전 버전까지는 보여줬고, 피드백을 받아서 수정한 게 지금 보내드린 버전이에요.

- 이것도 보여주고 피드백을 다시 받으렴.

- 앗, 넵.....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시 수정'하도록 유도하는 교수님의 말씀에 '제 머리가 너무 안 좋아서 이거 더 못하겠다'라고 말씀드리려던 호기로운 나의 결심은 얼결에 사라져 버리고.... 결국 친구들에게 다시 연락해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세상엔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직장을 다닐 땐 남의 돈 벌면서 밥벌이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고, 학교에 있을 땐 남의 돈으로 공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아, 어쩌면 뭘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남의 돈'으로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돈으로 했으면 좀 수월했을까?


노을은 남의 돈으로 보는 게 아니니까 마음껏 누리기!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부지런한 나 같은 사람은 적당히 노력해서는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회사를 다닐 때도 그랬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죽을 듯이' 해야만 겨우 그럴싸한 결과가 나왔다. 그게 어떨 때는 너무나 좌절스럽고, 모든 학자들이 다 이럴지(학자까지는 필요 없고 대학원생까지만 해도 될 듯)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한다.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이 즐겁다. 강의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살아있어 좋다는 느낌을 생생히 받는다. 하지만 연구를 할 때면 정말 나만큼 재능 없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멍청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실험 디자인을 도와주고 있는 세 명의 친구들 중 한 명이 이곳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인데, 어제 그 친구와 같이 공부하다가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그 친구가 '나도 그런 생각으로 우울해서 주말에는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라고 했다. 오늘 너랑 같이 공부하자고 한 것도, 그나마 너랑 있어야 덜 우울한 기분으로 조금이라도 진도를 나갈 거 같아서였다고.... 우리 학과에서 업적도 제일 많고 교수님들에게 인정도 제일 많이 받는 친구인데도 그런 얘기를 하다니 이건 마치 1억쯤 가진 부자가 100만 원 가진 사람에게 '나도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한다'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너 같은 애가 우울해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어찌 살라고! 그렇지만 그래, 적어도 나만 이런 고민 하는 건 아니니 조금은 위로가 되는 듯도 하다, 야....


긴 하소연 끝에 결국 자명한 결론이래 봤자 그냥 쭉 하던 걸 계속하는 것일 테다. 별 수 없다. 엉덩이로 공부하는 수밖에. 도서관에서 와서 랩탑을 켜고 어제 읽던 논문을 마저 읽는다. 실험 파일을 다시 열어보고 교수님이 주신 피드백을 살펴본다. 이따 점심을 먹으면서 친구와 다시 한번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정답이 있긴 한 건지, 있다면 언제쯤 찾을 수 있을지, 쓰다 보니 연구가 아니라 인생 고민 같지만, 별 수 있나. 열심히 오늘을 살자. 나는 잘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또 왔다, 슬럼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