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잇값이란 무엇일까
유학을 와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세상에는 정말로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아침형 인간, 저녁형 인간과 같이 생활 패턴이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그냥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배려나 예절의 정도가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를 굉장히 많이 본다. 나름 직장 생활도 해봤고 학교 생활도 오래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꽤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음을 여기 와서 절실히 깨닫고 있다. 이제 와 보니 그간 내가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아주 교양 있고 상식이 있는, 상위 1%에 속한 이들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말은 통했으니까. 외국인들은 차라리 아예 국적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서 그런지 내 상식 밖의 행동을 해도 저 나라에서는 저게 통하나? 싶은데, 오히려 한국인들끼리 있을 때에도 같은 나라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식을 벗어나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된다.
최근에 겪은 일 중 가장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던 일(사실 이 일 때문에 오늘의 브런치를 쓰게 됐다)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여기 재학생 중 한 명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일은 약 4개월 전에 처음 일어났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 친구가 나를 봐도 마치 못 본 것처럼 행동하고,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땐 그 사람에게만 아는 척을 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나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양 투명인간 취급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오늘 이 사람이 기분이 안 좋은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자 분명 이 사람이 내게 지금 기분이 상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고 그게 대체 무슨 이유에서 비롯된 건지, 이전에 나도 모르게 이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있나 기억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교회 갈 때나 만나는 정도의 친분인 데다가, 당시 내가 연구로 너무 바빠서 그 사람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자 인격적으로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들어 점점 화도 나고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그냥 가만히 내 공부만 하면서 지내고 있었을 뿐인데 누구 만나는 일도 줄이고 어디 놀러 나가는 일도 없었는데 이게 갑자기 웬 황당한 상황인가 싶었다. 대놓고 나한테 왜 그러냐고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묻는다고 과연 솔직하게 말할까 싶어 우선 참고 기다렸다. 그러다 결국 한 달 정도 그런 상태가 지속된 끝에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내가 결국 먼저 연락해 연유를 묻자 돌아온 답이 가관이었다.
"(Jeannie 씨가) 사람을 좀 툭툭 건드리시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물리적으로 건드린다는 거냐 아니면 정신적으로 건드린다는 거냐'라고 묻자 '물리적으로 건드린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말을 할 때 자기 몸을 툭툭 친다는 것이었다. 일단 내가 언제 그랬나 기억도 나지 않지만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니 알겠다고 하고 다른 이유가 더 없는지 캐물었다. 내 생각에는 내가 자기 몸을 툭툭 친다는 것이 한 달 동안 투명인간 취급할 정도로 중차대한 사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할 때는 정말 죽을죄를 짓지 않고서야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상대가 잘못을 했다 해도 그 잘못에 대해 지적을 해야지 인격적으로 무시를 하면 그것은 상대의 영혼에 깊숙한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분명 지금 미처 내게 말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해 계속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같았다. 자기는 누가 자신의 몸을 터치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기 때문에 나를 피하게 됐고, 어떻게 이걸 말해야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싶어 고민을 하다 보니 한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이었다.
우선 '고작' 그런 이유로 한 달 동안이나 사람을 무시했다는 사실에 첫 번째로 충격을 받았고, 지금껏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일로 지적을 받아본 일이 없는데 (난 대체 내가 언제 그 사람을 터치했다는 건지도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내가 웃거나 신나게 얘기할 때 어깨를 친 정도였을까?) 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나의 어떤 행동에 대해 이 정도로 민감하게 구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두 번째로 충격을 받았다. 차라리 이러이러해서 불편하니 조심해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 될 일이지, 영문도 모르는 채 한 달 동안 무시당하는 동안 내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상상할 사람이면 그런 일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당시 내가 마음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 정도였다. 나는 그래도 나름 한국인 유학생이라고 믿고 의지하고 잘해줬는데 돌아온 게 고작 몸을 좀 터치한다는 것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람이라니.... 안 그래도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데 내가 이해할 수도 없는 이유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니 스트레스가 치솟았다. 한국에서였다면 손절하고도 남았지만 여기는 미국 땅, 좁은 캠퍼스 한국인 커뮤니티. 손절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결국 '앞으로는 내가 주의하겠다. 그리고 혹시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고 내게 이야기해달라.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는 사람은 고통스럽다'라고 말하고 좋게 마무리지었다(지금 생각해도 내가 보살이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 사람을 손절한 상태였다. 마음 맞는 좋은 친구들이 곁에 많은데 굳이 그렇게 무례하고 상식이 어긋나는 사람과 친구 할 이유가 내게는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지나고 또 오가며 마주치다가 며칠 전 우연히 다른 학생까지 총 셋이서 산책을 하게 됐는데, 걷다가 별안간 그 학생이 나머지 다른 학생에게 '잠시 Jeannie 씨와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달라'라고 요청했다. 비켜달라 요청받은 학생도 당황하고 나도 당황했다. 알고 보니 내가 또 산책을 하다가 자신의 몸을 터치해서 기분이 안 좋으니 주의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몇 달 전에 그 사단을 겪고 힘겹게 용서를 한 나였는데 또 그런 말을 들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몇 달 전 그 일이 있었을 때 가족과 20년 지기 친구들을 비롯해 내 주위에 그 학생보다도 더 가까운 지인들에게 죄다 물어봤지만 그 누구도 내게 그렇게 남을 터치하는 습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고 나아가 그걸 불쾌해한 사람도 없었다. 아니라고, 솔직히 말해보라고, 너희 진짜로 내가 너희 몸 터치해서 불쾌했던 적 없냐고, 내가 최근에 이런 일로 지적을 받았는데 이게 진짜 내 오랜 잘못된 습관인지 궁금하다고 말하니 돌아오는 대답들이 한결같았다.
"그 사람이 이상한데? 네가 막 주먹을 때릴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이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사람이 이야기하다 보면 몸 좀 터치할 수도 있지. 다들 그러지 않나?"
그러니까 이건 마치 상대와 대화를 하다가 별안간 '너 왜 나랑 대화할 때 1분에 눈 10번 깜빡여? 앞으로는 5번만 깜빡여! 기분 나쁘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혹은 '너 왜 나랑 있을 때 자꾸 숨 쉬는 거야? 앞으로 나랑 있을 때는 숨 쉬지 마! 불편하니까!"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즉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는 나의 습관(이라고 그 사람만 이야기한다)에 대해 자꾸 누군가 불편하니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이것을 내 주위에 그 사람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을 한다면 마땅히 내가 고쳐야 할 것이 맞다. 그렇지만 35년 넘게 살아오면서 여태껏 내게 이런 것으로 지적을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유일하다. 유일하게 한 명이 자꾸 불편하다고 한다면 이건 그 사람의 문제 아닐까? 그리고 내가 과연 이걸 고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행여 필요가 있다 해도 고칠 수 없는 사안이다.
나는 내가 언제 그러는지도 모르는 나의 행동을 갖고 자꾸 문제 삼는데, 그렇다면 그냥 나를 손절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더니 그건 또 너무 심하단다. (사실 내가 손절하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거지? 나는 고치기 힘들 것 같은데. 그날과 같이 또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데. 고민 끝에 바로 다음날 불러내 '나는 이걸 고치기 힘들 것 같으니 당신이 알아서 나를 피하는 게 좋겠다. 한인 유학생 커뮤니티처럼 다 같이 모여야 하는 자리는 어쩔 수 없겠지만 굳이 우리 둘이 따로 만나거나 친하게 지내려 하지도 말자, 우리는 그냥 합이 안 맞는 것 같다. 내가 이걸 고칠 수 없다면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다'라고 '난 너랑 손절할 생각이니 그렇게 알아라'는 이야기를 아주 길게 돌려서 말했다.
예상대로 그 학생은 내 말에 기분 나빠했고 ("이미 다 결론 내려놓은 상태에서 저한테 통보하시는 것 같네요"), 자신을 굉장히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에 더 화가 났고 한 마디 할까 했지만 가만 보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아무리 입 바른 소리를 한다 한 들 그 말이 귀에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고 고마워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폭발만 하고 감정싸움만 하다 끝날 것 같았다. 나는 싸움을 싫어한다. 결국 열 살이나 차이 나는 학생에게 비위 맞춰주면서 '예민하다고 몰아가는 게 아니고 그냥 적당히 건강한 거리두기를 하자는 것'이라며 구슬리듯 말해주고 좋게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나는 열이 뻗쳐서 씩씩대다가 잠들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일어나 곰곰 생각해보니 이건 어찌 보면 그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일정 나이가 지나고 나면 더 이상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훈계가 먹히는 건 아동기, 청소년기에나 가능하다. 그것도 부모 정도나 되어야 권한이 생긴다. 그 학생은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요새 공부로 스트레스받은 걸 Jeannie 씨에게 푼 것 같네요"... 네?????) 사과는 절대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 갈등의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되자 불쾌해했고, 싫은 소리를 듣자 곧바로 역정을 내었다.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내게 애정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람의 부모도 아니고, 그 사람이 어찌 살든 알 바 아니기 때문에, 굳이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아 겉으로는 좋게 마무리 지었지만 앞으로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 않을 생각이다.
솔직함을 빙자한 무례함을 무기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의 모든 언행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내 기분 좋자고 주위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할 말 안 할 말을 가리는 법을 부모에게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값'이라는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나잇값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일정 나이가 되면 (그에 상응할거라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수준의) 인격을 겸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나이를 먹었는데도 그 나이에 걸맞는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부모 외에 누구도 마땅한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오은영 박사님처럼 나긋나긋하지도, 마냥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나이 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적을 만들어 좋을 게 없으니까. 굳이 내 손에 피 묻혀 가며 상대가 고마워하지도 않고 듣고 싶어하지도 않는 쓴 소리를 하면서 에너지 소모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두 웃으면서 허허허 하고 넘어가겠지만 뒤돌아서서는 그렇게 되기까지 엉망으로 키운 그 사람의 부모를 한심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많은 기회와 사람들을 잃게 되는 것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