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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Mar 27. 2024

소중한 날들도 다 지나간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소중하고 슬픈 시간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모두 가명임을 밝힙니다.)


치아코가 돌아왔다. 치아코는 나보다 일 년 반 먼저 이곳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던 일본인 친구로, 작년 이맘때 일본에 취직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갔었다. 당시 아직 박사 과정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취직이 덜컥 되는 바람에 우선 일본으로 가서 교직 생활을 하는 동시에 논문 작업을 했고, 마침내 완성한 논문을 들고 심사를 받으러 하와이에 돌아온 것이다.


치아코는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본받을 게 많은 친구다. 나와 관심 분야도 같은 데다가 성격도 잘 맞아서,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둘이 곧잘 붙어 다녔다. 사실 치아코는 나와 친해지기 전까지는 주로 혼자서 연구실에 공부하던 아이였고, 그래서 친구도 많지 않았다. 한 번은 치아코가 나한테 '나는 혼자서 공부할 때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와 같이 공부하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어'라고 말해주었다. 인간은 역시 사회적인 동물인 거야! 웃으며 대꾸했는데 참 기뻤던 기억이 난다.


치아코는 내게 가장 친한 친구이자 학문적인 동료였으며 멘토였고 정신적인 지주이기도 했다. 내가 인생 첫 국제 학회 발표를 앞두고 실험 결과 분석 때문에 골치 앓고 있을 때, 그녀는 새벽 3시까지 내 옆에 같이 앉아서 데이터 분석을 도와주었다. 당시에 본인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지냈는데 말이다. 우리 엄마는 소식을 들으시고 나서 '너 치아코 졸업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걱정까지 하실 정도였다. 치아코는 입이 무거워서 내 가장 깊은 고민을 털어놓아도 어디에 가서 떠벌리는 성격도 아니었고, 항상 학자로서 나 자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때마다 치아코는 '너는 훌륭한 학자가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었다.


그런 치아코가 봄방학을 끼고 논문 심사를 받으러 하와이에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를 비롯해 그녀와 친했던 친구들은 일찌감치 신이 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논문 심사일에 맞춰 이곳에서 제일 유명한 베이커리에 케이크를 주문해 문구("축하합니다, 치아코 박사님!")도 일찌감치 부탁해 두었다. 하와이는 사실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꽃다발보다는 lei (레이)라고 부르는 꽃 목걸이를 선물하는 전통이 있는데, 나 아니어도 분명히 레이를 준비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서, 나는 틈새시장을 활용해(!) 케이크를 사기로 한 것이다.


예상대로 넘치게 레이를 받은 치아코! 너무 많이 받아서 목에 겹겹이 두르다 보니 나중엔 얼굴이 파묻힐 정도였다.


치아코는 이곳에서 공부할 당시 우리 학과의 싱크탱크(Think Tank)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밤새 연구실에서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던 친구였다. 한 번은 동일한 학회에 4개 발표로 뽑힌 적도 있다(공동저자인 연구까지 포함해서이긴 하지만 그래도 4번의 발표는 대단한 것이다). 열심히 하고 성과도 좋으면서 늘 겸손해서 교수님들도 모두 예뻐했다.


그렇지만 이상하리만치 졸업 후 그녀의 커리어는 잘 풀리지 않았다. 치아코는 박사 학위를 받기도 전에 마지막 학기에 일본의 어느 대학교에 교수로 발탁되어 하와이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 날 연구실은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도 북새통을 이루었다. 떠나는 날 당일까지도 바빴던 그녀가 나중에는 결국 연구실 문을 닫고 없는 척해야 할 정도였다. 당시에 우리가 듣기로는 전임교수직이라고 들었고, 모두가 '역시 치아코!'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막상 일본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 일은 전임교수가 아니라 강사직이었으며, 일주일에 6개의 수업을 맡길 정도로 혹사시키는 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에서는 경력이 꽤 된 교수들도 5-6개 수업을 맡는 게 보통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세세한 사항을 치아코도 처음 제안을 받아들일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그곳에서 이미 근무하는 교수들의 텃세도 있었던 모양인지, 한 번은 전체 교수진 회의에 참석하려고 일부러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회의 장소에 갔는데, 먼저 도착해 있던 노교수 한 분이 '잘못 찾아왔다'며 돌려보내는 바람에 본인 연구실로 다시 돌아와 회의 일시와 장소가 적힌 이메일을 다시 확인했는데 제대로 찾아갔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연구실에 다시 왔다가 돌아갔으니 정해진 회의 시간보다 지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다시 돌아가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앞선 상황을 다 지켜본, 어쩌면 그 모든 상황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노교수가 입을 싹 씻고 모르는 척을 하는 바람에 결국 '신입인 주제에 유일하게 지각한' 교수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속상한 마음에 운 적도 있었다.


모두가 그녀가 잘 되길 바랐고 그렇게 되었다 생각했건만, 이건 뭐 제대로 되기는커녕 오히려 평균치보다 못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게 되자 우리 학과의 교수님들과 친구들도 속상해했다. 치아코가 그간 수고한 모든 시간과 마음 고생한 것들을 생각하면(그녀는 나와 함께 우리 학과의 노교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모든 상황을 유일하게 목도한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둘이서 정말 마음으로 끌어안고 그 모든 충격과 슬픔에서 빠져나와야 했던 슬픈 기억. 어쩌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우리 둘 다 생각보다 빨리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잘 풀려야 하는데, 게다가 그녀보다 더 못한 성과를 갖고도 멀쩡히 교수되고 잘 풀리는 사람들도 많은데, 인생이란 왜 이런 건지 그녀가 페이스북 메시지로 보내오는 소식들은 연일 마음 아픈 일들 뿐이었다. 여기서 박사 과정할 때도 힘든 소리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내색을 안 했던 친구인데, 그런 치아코가 이렇게 힘들어할 정도라면 이건 정말 어려운 상황임에 분명했다.


다행히 오랜만에 하와이로 돌아온 치아코는 좋은 소식도 덩달아 들고 온 상태였다. 일 년 남짓 되는 기간 동안 결혼도 했고(이게 가장 충격!), 그 몹쓸 학교는 1년을 딱 채우고 난 다음 그만두었으며, 일본 정부에서 하는 박사 후연구원 과정(Post Doctoral Program이라 해서, 보통 박사 학위는 땄는데 아직 교수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연구하는 직책을 말한다. 대개 2-3년 계약직이다 보니 우리처럼 막 박사 과정을 마쳤으나 아직 종신교수가 되기에는 경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발탁되는 경우가 많다)에 발탁이 되어 2년 간은 일본에서, 나머지 1년은 미국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피 섞인 가족이 아닌 남의 소식에 이렇게 기쁘다니, 그녀가 그간 했던 온갖 고생들에 대한 보상이 이제야 돌아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았다. 물론 박사 후연구원도 3년 계약직이니 그 후에는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봐야 하지만, 그래도 이전에 그 이상한 학교에 비하면 훨씬 좋은 환경인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3년의 연구경력이 쌓이면 그 이후에는 더 교수직을 찾기 수월해질 테니까, 여러 모로 좋은 소식임이 분명했다.



다른 학교나 학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 학과는 논문 심사를 하게 되면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다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는 전통이 있다. 소소한 발표들을 할 때도 그렇지만 특히나 박사 졸업 논문 심사는 그 사람이 지난 4-5년간 전력투구해 온 연구의 모든 것을 선보이는 자리이다 보니 이름이 '심사'이기는 해도 그 사람의 모든 업적과 연구를 함께 지켜보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축하해 주는 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 워낙 학과 식구들로부터 사랑받았던 치아코이기에 심사 시간 훨씬 전부터 이미 심사가 열리는 강의실이 북적였다. 심사도 다른 학생들에 비해 좀 길어졌음에도 다들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심지어 Zoom으로 접속한 온라인 청중들까지).


학생이 짤막하게 자신의 논문을 요약한 발표를 마치면 심사위원들이 돌아가며 질문을 하고, 이후 청중들까지 질문을 하고 나면 심사위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잠시 심사장 밖으로 나가게 된다. 심사장 안에 남은 심사위원들이 간단한 상의를 거쳐 통과가 결정되면 지도교수가 나와서 학생에게 악수를 청하며 축하 인사를 건넨다. 사실 논문 심사 일정이 잡힌다는 것 자체가 이미 통과가 거의 결정된 것임을 암시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이 공식적인 절차이다 보니, 잠시간의 대기시간을 지나 마침내 지도교수가 심사장 밖으로 나와서 대기 중인 학생에게 악수를 청하는 순간의 감동은 매번 보아도 늘 가슴이 벅차곤 한다.


치아코의 심사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우리들이 잠시 복도로 나와서 담소를 나누며 대기를 하다가 치아코의 지도교수님이 나와서 '축하합니다, 치아코 박사님!'이라고 이야기해 주었고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주었다. 교수님은 또 하나 좋은 소식이 있다며 치아코가 이미 다 끝난 연구인데도 예전에 신청했던 연구비가 채택이 되어서 큰 금액의 연구비를 받게 되었다고 했다. 결혼도 하고 연구비도 탔으니 다 이루었네!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 소식들을 듣는데 갑자기 내가 눈물이 마구 터져 나왔다. 당사자인 치아코도 안 우는데 내가 눈물이 흘러서 주책맞다고 생각되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심사에 통과한 것도 통과한 것이었지만, 이제 정말로 치아코가 이곳을 졸업해서 영영 떠나겠구나 생각하니 마치 내 박사 과정의 일부가 떠나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유일하게 내가 이곳에서 정신적인 충격을 겪었던 그 사건을 오롯이 함께 겪어낸 사람이기도 했다. 진짜 오래전에 박사 과정 동기인 두 사람이 다른 학회에서 만나서 마치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너무나 기뻐하며 반가워하길래 '저 정도로 반가울까?' 생각했었는데, 치아코를 떠나보내며 그 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것도 외국인인 두 사람이 잠자는 시간 빼고 거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면서 이 박사 과정이라는 전쟁 같은 시간을 같이 겪어내고 나면 전우애가 생기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치아코가 작년 이맘때 이곳을 떠날 때 내게 주었던 카드가 있다. 치아코가 떠난 날 밤 집에 돌아와 카드를 열어보고 나는 정말로 대성통곡을 했었다. 그 카드 안에는 내가 학자로서 듣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다 적혀 있었다. 이후에도 심적으로 힘들 때면 그 카드를 읽어보곤 했다. 지금도 그 카드는 내 책상 앞 보드에 붙어있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시간들 중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 보면 결국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시간이든 멈추지 않고 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점에서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이제 다시는 치아코와 함께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지도, 이해되지 않는 논문을 앞에 펼쳐두고 질문을 하는 날도 없겠지만, 내 인생에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이 박사 과정의 큰 부분을 치아코와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치아코가 내게 남겼던 카드 글귀를 끝으로 오늘의 일기를 마무리한다.




"지니,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마침내 이 카드를 쓰게 되는 날이 오네. 내 영어 어휘가 많이 부족해서 내 마음을 충분히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 


지니, 너는 내게 가장 따뜻한 언니이자 친구였어. 늘 나와 함께 공부하고 시간을 보내주어 고마워.


나는 가끔 네가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어. 네 연구는 충분히 가치 있고 훌륭한 연구인데, 네 스스로 '이 연구는 보잘것없는 것 같다'고 하고 '나는 이 연구를 하기에 적임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할 때마다 안타까웠어. 모든 연구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어. 우리는 어떤 식으로는 이 학계에 기여한다고 생각해. 그러니 앞으로는 네가 부족하다, 네 연구가 부족하다는 말은 하지 말았으면 해.


늘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 우리 꼭 같이 공동연구를 하자!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학자인 지니에게. 치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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