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완주를 목전에 앞둔 자의 넋두리
지난 학기를 끝으로 박사 후보생이 되었고, 그 말인즉슨 이제 남은 것은 논문뿐이라는 뜻이다. 조금만 더 가면 고지가 코앞인데,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지난 수년간 달려왔는데,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나는 대차게 흔들리고 있다.
일단 너무나 외롭다. 늘 외로운 게 유학생활이지만 그 외로움이 훨씬 더 배가 된 까닭은 비슷한 시기에 입학해 공부하던 친구들이 이제 박사 후보생이 되면서 이곳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고, 나보다 좀 일찍 입학했던 친구들도 졸업을 해서 여길 떠났기 때문이다. 기숙사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들 또한 우리 모두가 동일한 시기에 입사해서 동일한 시기에 졸업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이제는 남아 있는 친구들이 별로 없다. 즉 같이 고락을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이 거의 사라졌다는 뜻이다.
한국인 친구들도 떠나거나, 아니면 사이가 멀어지거나 (이전 포스트 참조) 해서, 남아 있는 (마음을 나누는) 한국인 친구들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날은 한국에 있는 가족과 통화를 하지 않는 이상 한국말을 한마디도 안 하는 경우도 생긴다. 주말의 경우에는 어디 마트 가서 장 보지 않는 한 입 자체를 안 여는 날도 더러 있었다. (저녁에 잠들 때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었다).
요즘처럼 경기 불황, 출산율 감소 시대에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교수직을 따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보니 졸업을 한다 해도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안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 자체가 이미 고되고 힘든 일인데 그 이후의 삶이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으니 힘이 더 빠지는 것일 테다.
아침에는 난데없이 아버지가 카톡 메시지를 보내셔서 깜짝 놀랐다. 그냥 주말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가 생각나서 보내셨다고 했지만, 그래서 하나도 외롭지 않은 척 씩씩하게 밝게 웃으며 통화하고 끊었지만, 사실 전화 통화를 끊고 나서 눈물이 나는 것을 꾹 참았다. 가족 다 놔두고 여기서 혼자 외롭게 뭐 하고 있나 싶다. 박사 후보생이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도 모르는 문외한처럼 느껴진다. 여전히 좌충우돌, 연구를 구상하고 구체화시키고 페이퍼를 쓰는 모든 과정들이 버겁다.
사실 박사 후보생 신분이 되면 그때부터는 꼭 미국 땅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사실 꽤 많은 학생들이 후보생 신분이 되면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미국인 학생들의 경우 본가가 있는 주로 돌아간다)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하는데, 나 또한 이번 학기를 앞두고 그렇게 할까 잠깐 고민했었지만 아무래도 한국에 있으면 논문 쓰는 속도가 더 느려질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교수님과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발전시켜야 할 부분들이 많아서 미국으로 들어왔었다.
그렇지만 늘 모든 것에는 장단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가족과 함께 있으니 외로움도 덜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되지만, 그만큼 주위 친구들은 다 이미 직장 다니고 가정을 이루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쉽게 접하고 귀로도 들려오는 소식들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학업에 집중이 잘 안 되기가 쉽다. 미국에서는 그런 것들과 아무래도 좀 거리를 두다 보니 집중할 수 있지만 대신 가족과 떨어져 있고 타국에서 혼자 있는 것이다 보니 외로움이 커진다. 조금만 더 외로워하더라도 논문을 얼른 끝내자 굳은 결심을 해서 돌아온 미국. 첫 한 달만 해도 바빠서 우울해할 틈도 없었는데, 이제 조금 여유가 생기고, 아니 사실은 한 달간 열심히 발전시켜 온 실험 디자인에 대해 조금은 뼈 아픈 피드백을 듣고 난 지난주와 이번 주, 기운이 빠지면서 의욕을 잃은 게 큰 것 같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이걸 가족에게 말하자니 괜히 한국에서 속상해할 테고, 그래서 그냥 혼자서만 묻어두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통화하면서 아버지가 건네신 말씀에 울컥한 가슴 한 켠이 지금도 얼얼하다.
"그냥 이번 학기 마치면 한국 들어와. 들어와서 논문 나머지 부분 써. 연말에 짐 정리하러 내가 미국 들어갈 테니까 같이 정리하고 들어오자"
맞아요 아버지. 내가 여기서 지금 왜 이러고 있을까. 이 학위를 딴다고 대단히 분홍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는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사실 그다지 대단한 직업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나는 과연 유학을 온 게 잘한 결정이었을까요? 그래도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 후회하고 아쉬워했겠죠? 유학을 온 결정 자체는 당시에는 최선이었어요. 돌아가도 아마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는 몰랐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미 유학을 와서 경험하고 나니... 유학이란 것이 꼭 와볼 필요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냥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았어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속으로 꿀꺽 삼킨 이야기들. 아버지가 들으면 속상해하셨을 넋두리를 브런치에나마 남겨본다. 불안과 싸우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숙명이지만 특히나 내 나라에서 내 나라 말로 해도 어려운 학업을 해외에서 하는 유학생들이야말로 그 불안함이 배가 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아닐까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연 이 끝에 어떤 결실이 있을지, 지금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연구의 행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든 유학생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모두 좋은 결실을 얻으실 수 있길, '유종의 미'가 있길, 꽃길만 걸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