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암 진단을 받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언제나 간직하고 기록하는 것들에 진심이었다.
결국 오래 지나 알게 되었지만,
나는 감정이 느리고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적어도 글보다는 그렇다.
적절한 시간에 흘러 보내지 못했던 감정들에 아쉬움이
더해져 글을 쓰고, 정리 정돈하는 것들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여전히 나는 엄마를 하는데 하루를 가장 많이 쓰고,
몇 해 전과 비슷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만,
읽고 쓰는 행위가 잘 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17개월 차이로 두 아이를 출산 후 코로나19에 2차례 감염되었고,
40도가 넘는 고열에 구급차를 타고 실려가, 그대로 a형 감염 판정을 받고 한 달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30년 넘도록 타고나게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여러 가지가 겹쳐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아이들을 길러내며 피곤하지 않은 날이 없어 몰랐으려나 -
가볍게 받은 건강검진에서 덜컥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엄마가 10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고 완치하셔서 나에게 암은 그리 무서운 병은 아니었다.
암센터에서 추가 검사를 여러 날에 걸쳐 받고 한 달 뒤로 수술날짜를 잡게 되었다.
괜히 싱숭생숭한 마음에 무리해서 강원도 여행을 앞둔 어느 날,
들뜬 나에게 남편은 친정인 광주에 내려가자고 했다.
순간 짜증을 내며 무슨 소리냐고 했던 그때의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
아빠가 약해져 가는 것을 느낀 것은 꽤 되었지만,
어제까지 멀쩡하던 아빠가 하인두암으로 대학병원에서 입원을 하셨다고,
진행이 많이 되어 있는 희귀 암으로 동네 이비인후과 소견서를 가져간 당일에
응급 수술 날짜를 잡게 되었다고 했다.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은 큰 딸이었는데,
내가 암이란 소식을 전하는 것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
맙소사, 아빠가 나보다 먼저 더 큰 수술을 하게 되셨다.
수술 후엔 목에 구멍을 뚫어 기도를 확보하고, 콧줄을 통해 경관식으로만 식사를 할 수 있고,
목소리가 변하거나 잘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눈물을 흘릴 틈도 없이 밤을 새워 가며 검색을 해보아도 희망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환우들과 보호자들이 모여있는 카페에는 선뜻 덧글이나 질문을 남길 수가 없었다.
그분들이 아직 세상에 살아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 앞에 타인의 더 큰 아픔을 확인하는 것으로
안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