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쓰는 영화비평
스무 살이 넘었을 때, 죽음은 더 이상 금기시되지 않았다. 장례식을 상상해보는 건 물론 그분이 얼른 돌아가셨으면 한다고 입 밖으로 말할 수도 있게 됐었다. 시들어가는 아버지가 드시고 싶다던 부드러운 빵을 곁에 놓고 다시 팔월의 크리스마스를 재생했다. 나는 정원과 아버지는 비교 대상이 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둘은 같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자꾸 볼수록 둘은 닮아있었다. 정원이 마주한 자신의 죽음을 다루고 받아들이는 순간순간에 어느새 내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져 있었다.
사라진다는 것은 담담해질 수 있는 일인가? 정원은 줄 곧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하얀 병원 벽에 머리를 기대다 환자복을 입은 꼬마를 발견하고 천진한 미소로 장난을 주고받는다. 얼굴이 작아 보이게 사진을 찍고 싶은 여자에게 머리칼을 치워주며 예쁘다고 말한다. 장례식에 다녀온 후 피곤이 몰려왔지만 기다렸던 다림에게 오히려 미안하다며 하드를 건넨다. 손에 꼽아지는 살아있을 날들과 더불어 죽음을 마주 보는데 정원은 초연해진 것 같았다. 내 아버지 역시 언제나 담담하고 초연했다. 어느 새벽녘 갑작스레 몇 시간 동안 아버지의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진지하게 사라짐에 대해 고민했지만 잠들어있던 모두를 깨워 응급실에 실려 갔다. 정원이 병실에서 식판을 물리려다 다시 남은 밥을 싹싹 긁어먹는 장면은 내게 아버지가 그 순간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어렴풋 상상하게 해 준다. 결국 남은 삶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초연한 미소를 짓는 정원도, 막걸리를 물처럼 드시며 죽음이란 단어를 항상 읊조리던 아버지도 한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지속을 원한다. 사라진다는 것은 쉬이 담담해질 수 없는 일이다.
촬영은 꼭 카메라로 조심스럽고 예민한 빛의 시를 써 내려가는 듯했다. 빛은 조금의 이질감도 없이 화면에 스민다. 원래부터 자연광을 추구했다던 유영길 촬영감독은 조명이 인물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것보다 그것이 인물과 한데 어우러짐에 더 초점을 두었다. 오프닝부터 풍부한 빛들이 어김없다. 문 틈 사이로 사악 들어온 빛은 안경과 정원을 차례로 비춘다. 정원이 깨어나고 얼마 남지 않은 하루들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밖을 응시한다. 주차 단속을 하는 장면에서는 다림 얼굴 위로 지나가는 다양한 바깥 사물의 그림자와, 다림과 정원이 맥주를 마시는 장면에서 두 인물을 스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묘하고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조명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밤 장면들도 거의 반사된 빛들을 사용한다. 번개에 반사된 빛이 정원의 얼굴을 스치거나 그가 베개를 감싸고 숨 죽여 우는 장면에서도 바깥에서 반사된 빛이 조명 원으로 사용된다. 전혀 과함이 없다.
장례식장 시퀀스에서는 이런 빛의 대비가 돋보인다. 어둡게 처리된 실내에서 통곡하는 사람들 뒤로 밝은 야외가 대비된다. 컴컴한 죽음의 세계에서 빛으로 가득 찬 삶의 세계로 시선이 이동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시선은 관습적이지만 이 장면은 벗어난 그걸 벗어났다. 가장 첫 번째로 발견되는 탁월함이다. 그것이 꼭 영화의 복선 같이 느껴지기도 하며, 영화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구조적인 시선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원이 마루에서 발톱을 깎는 모습 장면 역시 어두운 마루와 빨래가 널려있는 실외가 역시 어떤 세계처럼 대비가 이루어진다.
손톱과 발톱은 인간의 신체에서 가장 빨리 자라난다. 매니큐어를 바르고 그냥 놓아두면 손발톱 아래 생긴 빈 공간만큼 시간의 흐름이 재어진다. 발톱을 깎다 눈물이 고인 정원의 모습이 왜 그렇게 공감이 됐을까 생각했을 때, 정말 일상적이라 생각했던 그 행위가 다르게 보였다. 발톱을 깎는다는 건 정원에게 인간으로서 청결과 위생을 위한 의례적인 것이 아니다. 남은 삶을 손에 꼽게 되는 사람들에게 그건 어김없이 흐르는 시간을 피부로 와 닿게 하는 일이다. 정원은 속에 있던 깊은 한숨을 뱉으며 마루 위에 눕는다. 정원에게 시종일관 덧 입혀져 있던 사람 좋은 미소와 콧잔등에 걸친 안경이 함께 벗겨진다. 그의 맨 얼굴이 처음으로 화면에 바스트 샷으로 잡힌다. 빅 클로즈업으로 잡힌 것도 아니기에 화면 가까이 가야 식별 가능한 눈물이다. 눈물이 어떻게 흐르는지에 따라서도 영화의 정서가 크게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하는 장면이다. 눈물은 뺨 위로 흐르지 않고 눈 속에 고이며 그것이 이 영화의 절제와 간접 표현의 방식에 또 한 번 정점을 찍는다는 게 느껴진다.
영화 속의 주로 등장하는 장소는 다양하지 않다. 집, 병원, 사진관, 동네 등이 전부다. 인간의 일상은 집과 학교, 집과 직장 같은 장소들을 주로 오가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제한적인 장소 설정 역시 우리 내 일상처럼 실재감 있게 와 닿는다. 단순해 보이는 영화의 일상적 배경에는 사유와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세밀한 구성과 배열이 존재한다. 우리는 실재 일상 속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일에 문득 미학을 찾고 어떤 의미를 발견한다. 영화 속에 그런 것들이 녹아 있었다. 뒤늦게 나는 그런 흔적들을 캐치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 나와 버드나무 밑에 앉아있는 정원 뒤에 아이 둘이 모래놀이를 한다. 왼편에 아주머니가 아이를 따라가려다 바닥에 주저앉아 공기놀이를 한다. 남자들은 굴뚝처럼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누군가의 생이 끝난 ‘장례식’의 풍경은 정말로 그렇다. 의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이게 되며 각자 살아온 만큼 그 ‘장례식’을 대함의 모습이 있다. 그중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이런 인간상들이 세밀하고 다양하게 정원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다. 빙그르 돌아가는 빨래도 마찬가지다. 정원이 발톱을 깎는 장면에서, 술에 덜 깬 채 철구의 전화를 받는 장면에서 두 번씩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언뜻 보면 너무나 사소 하지만 그 소품 하나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정원 말고는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고 고요하며 여느 때처럼 흐른다는 분위기를 준다. 정원과 다림이 놀이기구를 다 타고 벤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그때 그 사이로 웨딩촬영을 하러 온 사람들이 지나간다. 촬영을 하며 얻어걸렸거나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전경 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일상 표현을 위해 일관성 있는 세밀한 구성과 배열을 구사한 걸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영화를 네 번째 봤을 때 나는 이 장면이 삶의 끝자락에 있는 정원과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다림의 결말이 예측되는 관계를 사유하게 하며 맥락을 같이 한다고 생각되었다.
자꾸 등장하는 텅 빈 운동장은 처음에는 그저 주변을 환기하는 장식적인 인서트 컷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컷들은 오프닝의 내레이션과 분명한 연결점이 있었다. 텅 빈 운동장이란 정원이 처음 사라짐에 대해 생각했던 상징적인 장소이다. 초반에는 정원이 그 운동장에 있었고, 두 번째는 어둑한 밤이 내려앉아 있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 번째는 비가 그치고 여기저기 웅덩이가 생겼다. 네 번째는 다림과 정원이 함께 그 운동장을 달렸으며 마지막에는 두껍게 눈이 쌓여있다. 다양한 다섯 번의 모습은 영화에 리듬을 형성하며,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는 법 없는 정원이라는 인물의 상징적인 마음 상태와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던 그의 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그저 잔잔하게만 보이는 이 영화 속에 나름 스토리의 발단, 전개, 위기, 절정의 상징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비디오 재생하는 법을 모르는 아버지에게 정원이 방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몇 번을 알려드려도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정원은 방을 뛰쳐나간다. 혼자 남겨질 아버지에 대한 슬픔과 걱정, 조금 격해진 감정을 누르며 종이 위에 재생 방법을 써 내려간다. 경찰서에서 자신이 곧 죽는다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슬픔에 욕을 하는 장면과 더불어 정원의 감정이 표면 위로 드러났던 몇 안 되는 장면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후에 연결되는 하얀 쌀뜨물이 하수구로 내려가는 컷이 더 뇌리에 남는다. 오프닝에서는 하루의 시작은 잠에서 깨는 정원의 얼굴이었지만 두 번째는 하수구에 내려가는 쌀뜨물이다.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은 대게 푸른 새벽에 동이 트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내재된 기억 속에는 쌀을 씻거나 밥을 안치는 냄새가 더 익숙할 것이다. 장례식 장 시퀀스에서 식장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밥을 먹으러 가라며 산 사람은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냐는 외침이 생각난다. 그처럼 밥을 짓는 행위만큼 살아있음을 암묵적으로 반영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림이란 인물은 영화의 서브 캐릭터지만 신구라는 배우가 분한 ‘아버지’도 그에 못지않다고 역할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정원의 아버지는 아들의 아픔과 고통을 자신이 대신해줄 수 없다는 걸 일찍부터 깨달았기에 언제나 거리를 두고 정원을 바라본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공간과 바라봄에 온갖 슬픔의 표정이 있다. 당시 실제로 아들을 잃었다는 배우 신구의 연기는 시한부 아들을 둔 아버지의 심정을 정말 아는 듯 착각을 일으킨다. 아들이 숨 죽여 울지만 그 소리를 다시 또 베개로 틀어막고 있는 걸 정원의 아버지는 역시 바라만 본다. 그리곤 창가로 간다. 창살 그림자는 정원 아버지의 얼굴과 몸에 빗살처럼 드리워 그의 시름을 더 깊어 보이게 만든다. 아들이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도 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바라본다. 때론 뒷모습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정원의 아버지는 화초에 물을 주는 장면이 짧게 등장한다.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과 물만 공급되면 언제나 싱싱한 화초가 상징적으로 연결된다. 정원의 아버지는 분무기로 그런 화초에 물을 분사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안타까움과 그 삶이 조금이라도 지속됐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표현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림의 삶은 정원과 비교하면 싱그럽다. 다림은 이제 막 피어오른다. 하지만 반복되고 지루하며 때론 몸싸움까지 해야 하는 주차 단속 요원인 다림의 일상은 각박하다. 그런 그녀에게 정원과 초원사진관은 휴식처가 되어준다. 소파 위 더위에 지친 다림에게 정원은 선풍기를 쐬어주고 아이스크림을 준다. 정원은 언제나 따뜻하게 다림을 맞아준다. 다림의 생기로움과 당돌함이 정원에게 역시 자꾸 웃음을 준다. 화장을 하는 등의 다림의 성숙해져 가는 모습과 팔짱을 끼며 성큼 거리를 좁혀가는 행동이 정원에게 생기로운 삶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게 해준다. 영화를 한번 봤을 때는 변덕스러운 다림에게 정원은 꼭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상호 작용적인 관계이다.
다림이 변덕스럽다는 생각은 꽤 오래갔다. 두 사람은 어느 연인들처럼 비속에서 로맨틱하게 우산을 쓰며 걸었다.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고 인물이 계속 걸어오며 다림의 표정이 확대되는 좀처럼 보지 못한 기법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술을 사달라고 말했지만 다림이 결국 사진관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이미 주고 있다. 세월은 사랑도 추억으로 남게 한다는 내레이션처럼 시간이 변화시키지 않는 것은 없다. 게다가 다림은 깊이나 정도보다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은 스무 살 초반의 나이다. 이는 엔딩에서 다림이 사진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사진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장면도 납득이 된다. 클럽 화장실 거울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사진관 문틈으로 매일 편지를 넣었다고 다림이 끝까지 정원을 기다리거나 정원의 시한부임을 알게 된다는 건 신파적인 드라마의 관습이다. 현실에 사랑은 지원이 정원에게 찾아와 사진을 지워달라고 한 것처럼 움직이고 멈추는 것임을 생각하면, 엔딩은 정말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병실에서 동생이 보고 싶은 사람이 없냐고 물었을 때 정원은 없다고 말한다. 정원 역시 다림이 삶에 대한 갈망의 기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를 예술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창이라는 소재가 첫 번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창에 비친 인물들이나 창을 매개해 인물을 카메라에 담는 형식은 그저 관찰자의 시선을 계속 유지한다고 마무리 짓기는 부족하다. 또한 정원의 아버지의 쓸쓸함이 더 돋보였던 거리 유지와 다르다. 사진관에 찾아온 지원의 얼굴이 물에 씻겨지는 창 너머로 비친다.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있는 다림이 창을 매개해 보인다. 특히 후반부에 카페 유리창에 비친 다림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짚는 것과, 정원이 얼굴과 다림이 올라탄 차를 유리창이 또 프레임 안에 하나의 프레임으로 완성되는 컷은 한 장의 그림을 보는 착각이 든다. 그런 창이라는 소재는 장소나 시간, 이유, 목적에 대한 일상적 관찰이 중지되며 사물이나 인물들의 순수한 본질이 직접 파악되는 관조를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다림이 사진관에 돌을 던지는 상황 역시 이 영화가 왜 예술적으로 보이는 가에 대한 근거들이 보인다. 불 꺼진 사진관을 보고 다림은 실망하며 돌아가지만 카메라는 정지된 화면처럼 사진관 앞에 그대로 멈춰있다. 그렇게 몇 초 후 다림은 다시 돌아와 돌을 던지다. 우리는 흔히 발표 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때도 의도적으로 정적을 만들 때가 있다. 그런 몇 초간의 정적은 거울에 비친 다림의 눈물보다 더 강렬하다. 다림의 심리상태와 좀 더 분명히 파악되고, 사진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더욱 날카롭게 귓전을 울린다. 이와 더불어 실내에서 실외를 응시하는 카메라 안에는 다림의 얼굴 가운데로 깨진 유리의 선이 지나가는 이미지가 담긴다.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정원이 다림에게 쓴 편지는 전해지지 못하고 상자 속으로 사라졌다. 정말 담담해진 얼굴로 정원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아버지로 인해 초원 사진관은 계속 운영되고 다림은 정말 아가씨가 되어 빨간 스카프를 매고 찾아오지만 결국 돌아선다. 텍스트는 창작자의 손을 떠난 순간 독자에 의해 어떻게든 변형되고 해석될 수 있다는 말에 격렬하게 동의한다. 하지만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가 샷들 마다 녹아있어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을 금기시하지 않고 내가 그것에 대해 비로소 자유롭게 말하게 되었을 때 내 삶이 어느 방향에서 시작되고 끝나는지에 대한 윤곽이 희미하게 그려졌다. 죽음에 대해 자꾸 생각할수록 내 삶이 소중해졌다. 정원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설정도 반대로 삶 속에 내 흔적들을 돌이켜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혀가 따가운 매운맛이나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사람은 신선한 채소로 담백하게 어우러진 절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화학적인 영상언어에 길들여진 내게 처음 다가온 팔월의 크리스마스가 너무나 단조롭고 지겨웠다. 또한 팔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기 전에 나는 영화를 어떻게 인간적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빡빡하게 들어찬 기존 영화라고 불리는 영상들에서 빙그르르 돌아가는 빨래 같은 건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원이라는 인물에 보는 이를 투영하게 하여 인간이 왜 고귀한 존재인지 느끼게 해준다. 영화는 인간적 산물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