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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롱썸 Dec 13. 2016

[번외편] 안개가 자욱한 마을

사파(sapa)로의 짧은 여행. 긴 트레킹

사파에 오려고 베트남에 왔는데 

사흘 내내 창밖으로는 안개밖에 안 보여요.


호텔에서 한국인 커플을 만났다. 사파를 보기 위해 한국에서 하노이까지, 하노이에서 사파까지 왔다고 하는 이 커플은 사흘간 사파에서 본 것이 안개뿐이랬다. 이 커플을 만난 것은 나의 사파 첫날이자, 그들의 사파 마지막 날이었다. 그들은 지금껏 있던 중 가장 날씨가 좋은 아침이라고 했지만 아직도 밖은 안개로 덮여있었다. 안개가 심하면 트레킹을 해도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한다는데, 날을 잘못 골라도 아주 제대로 잘못 골랐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좋은 날씨'의 아침은 결과적으로 내가 사파에 있던 중 가장 나쁜 날씨가 되었다. 온 산을 뒤덮고 있던 안개는 서서히 사라져 갔고, 해가 나기 시작했다. 사파에 있는 동안 안개가 개이고 해가 날수록 왠지 모르게 그들 생각이 나서 괜히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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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칸 마다 회사가 달라 외부며 인테리어가 다르다 
생각보다 아늑했던 기차칸. 2층에 짐을 풀었다

나는 하노이에서 슬리핑 기차를 타고 사파에 왔다. 언제 어디서든 내 집처럼 편하게 잘 수 있는 축복받은 몸 덕에 꿀 같은 잠을 자고 개운하게 라오까이 역에 도착했다.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라오까이에서 미니밴을 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기차에 내리는 인파에 스리슬쩍 묻혀 있다가, 괜찮아 보이는(안전하고 요란스럽지 않아 보이는) 여행객 + 삐끼의 조합을 발견하였을 때 적절히 타이밍을 봐서 동행해도 되냐고 물었고, 그렇게 기차에서 내린 지 3분도 되지 않아 시내로 가는 저렴한 차편을 구할 수 있었다. 미니밴은 첫 승객인 나와 호주 백패커 둘 외에도 친구들끼리 여행 온 베트남 사람들, 이곳저곳에서 온 외국인 여행객들을 가득 태워서야 라오까이 역을 떠났다. 모든 승객을 하나하나 호텔 앞까지 데려다주는 이 벤의 요금은 5만 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빨래는 어쩐지 항상 정겹다

호텔에는 7시가 좀 넘어서 도착했던 것 같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호텔 주인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8-9시쯤 시작되는 트래킹을 하기로 결정했다. 트래킹은 생각보다 고됐다. 사실 등산이라면 누구보다 싫어하는데, 사파까지 와서 산에 오르지 않고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트래킹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hiking도 climbing도 아닌 tracking 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동네 곳곳에는 아이들이 많다

트래킹을 하며 감상한 사파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추수가 끝난 뒤라 별로일 것이라는 우려는 우려에 불과했다. 날씨도 아침에는 좀 추운가 했더니 낮이 되고 트래킹을 하다 보니 얇은 긴팔 정도가 적당한 딱 좋은 날씨가 되었다.


그러나 사파의 트래킹은 생각보다 고됐다. 땅은 트래킹 하기에 아주 안 좋았다. 진흙으로 된 부분이 많아 걸음걸음 내딛을 때마다 쩔꺽쩔꺽하는 소리가 났다. 땅은 그냥 '미끄럽다'고 하는 정도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상태였다. 걸음을 내딛으면 다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땅이 나를 지탱해주는 게 아니라 내 발에 밟힌 흙이 내 무게와 함께 찐득하게 흘러내려버렸다. 흘러내리는 흙에서 나도 같이 흘러내리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아홉 명쯤 되었던 우리 트래킹 팀에서 거의 절반 정도가 한번 이상 넘어졌고, 내가 가장 아끼는 나의 운동화는 트래킹이 끝날 때쯤 진흙으로 뒤덮여 속상했다. 내가 산을 싫어한다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트래킹 말고는 사파에서 딱히 할 게 없는 탓에 나는 이 다음날도 깟깟마을, 함롱산에도 가서 트래킹을 하였고,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산에 오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와 중에 우비를 잊지 않고 챙겨간 내가 기특했다. 하늘에 구멍 뚫린 듯이 비가 오던 날 덤터기 써서 5천 원 가까이 주고 산 값비싼 우비는 미끄러워 넘어져도 최소한 위에서부터 엉덩이까지는 더럽혀지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이건 분명 오천 원 이상의 든든함이었다



화창했던 둘째날 낮 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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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에서 먹은 가장 맛있는 식사는 The Hill Station Signature Restaurant에서의 식사였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경치 좋은 카페에서 조금 뭉개다가 깟깟마을을 둘러보고 나니 1시가 좀 넘었던 것 같다. 전날 저녁으로 The Hill station Deli&Boutique의 햄버거와 애플파이를 먹고는 크게 실망해서 안 가려고 했다가, 가게 이름에 signature 정도 붙여줬으면 음식이 좀 다를까 해서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나저나 The Hill station Deli&Boutique 햄버거는 정말 형편없었다. 네*버 블로그에서 인생 햄버거라는 것을 보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주문한 지 거의 30분은 다 되어서야 음식이 나왔을뿐더러, 패티는 지금껏 먹어본 수제버거 중 최악이었다. 겉은 잘 구워지고 속은 육즙을 품어 촉촉한 패티를 기대했는데, 일단 겉모습부터가 불합격이었다. 구운 건지 삶은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릇 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패티의 맛은 역시나였다. 씹고 있자니 인생까지 퍽퍽해지는 기분이었다.


좌식 공간이 있으면 항상 그곳으로 가서 앉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 Hill Station Signature Restaurant에 간 이유는 사실 착각 때문이었다. 호이안에서 애플파이를 먹고 크게 감동한 집이 나는 힐스테이션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맛있는 애플파이를 만드는 집이 맛없는 음식을 낼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다시 한번의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호이안에서 내가 갔던 곳은 Hoian Roastery 였고, 둘의 공통점이라고는 동그란 로고뿐인데 대체 왜 착각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히 The Hill Station Signature Restaurant의 음식은 꽤 괜찮았다.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닭고기 수프와 밥, 오랜 시간 조리한 돼지고기는 마치 집밥을 먹는 듯한 편안함을 주었다. 향신료 사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집에서 단백질 섭취를 위한 닭고기 요리에 항상 향신료를 이것저것 첨가하곤 하는데, 이 곳에서의 닭고기 수프에서 딱 내가 하던 그런 닭고기 요리 맛이 났다. 베트남 전통 음식에서 집밥을 느끼다니 우스웠다.


집밥의 맛이 느껴지던 식사와 두잔의 담금주


만족스러움을 더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이 집의 담금주였다. 이 곳에는 자두, 시나몬&꿀, 고추, 파인애플 등을 담가 만든 술이 이것저것 있었다. 술은 아직까지 음식에 비해 시도할 경험이 적었던 터라 급 욕심이 생겼다. 맥주 한 캔에 온 몸이 붉어지는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알코올 분해 능력이 한참 떨어지지만, 이런 기회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기왕 마시는 거 좀 더 욕심을 부렸다. 맛을 보기 위한 건데 네 가지 맛 중 하나만 선택하는 건 성에 차지 않아 두 가지 종류를 선택할 수 있는 Tasting set를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두 개의 음식 주문 끝에 자두와 시나몬&꿀맛 술 주문을 덧붙이니 주인아저씨는 걱정을 내비쳤고, 나는 이에 문제없다며 엄지를 척 내보였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식히느라 한참을 앉아있어야 했지만 깟깟마을 트래킹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함롱산 트래킹은 좀 힘들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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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까지 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함롱산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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깟깟마을로 향하는 산자락에서의 커피 한잔

산자락에 있는 카페에서 보이는 풍경


사파에서 깟깟 마을로 가는 길은 기나긴 내리막이다. 사파에서 막 나와 깟깟마을로 가는 길을 걷던 참이었다. 내 앞으로는 한국인 둘, 뒤로는 서양인 둘이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앞서가는 한국인 둘은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돌 노래를 흥얼거리며 깟깟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걸음은 제법 빨랐고, 그들의 목적지는 명확해 보였다. 뒤에서 따라 걷는 나의 걸음도 느리지 않았다. 걷다 보니 순식간에 카페 두 개를 훌쩍 지나치게 되었는데, 왠지 모르게 지나친 카페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잠시 멈추어 생각했다. '커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으면서도, 이런 경치 좋은 카페를 모른 척 지나가는 건 말이 안 되지.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닌데'.


내려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 그중 한 곳에 들어갔다. 주인아줌마가 주는 메뉴를 몇 장 넘기며 보는 척하다가, 늘 그렇듯 카페 쓰어더를 시키고 가장 경치 좋은 스탠딩 의자에 엉덩이를 얹었다. 이 카페를 놓친 앞서가던 둘이 안타깝던 찰나, 카페 한쪽에는 언제 사라졌는지 안 보이던 서양인 둘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보고도 지나치는 사람, 보고 생각해야하는 사람,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이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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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사파 여행 팁을 요약해 보자면,


1. 사파는 날씨가 중요하니 날씨를 체크할 것. 11월 말은 안 좋을 확률이 매우 높음.

2. 하노이-라오까이 슬리핑 기차는 주말에도 이틀 전에 예약할 수 있었음. 비수기라 그럴 수도

3. 사파-하노이 슬리핑 버스는 하노이 출발 당일 예약했음. 모두 매진되어 오후 10시 출발 옵션밖에 없었음.

3. 하노이-사파 슬리핑 버스는 우등버스가 아니고는 서비스 질이 형편없음. 싱 투어도 예외는 없음.

4. 환승의 번거로움을 고려해도 슬리핑 기차가 슬리핑 버스에 비해 훨씬 편함. 난 슬리핑 버스에서도 잘 잤지만.

5. 라오까이 역에 내려 사파 숙소까지 가는 것은 미니밴을 이용하면 되고, 산속에 있는 숙소여도 다 데려다 줌.

6. 미니 벤 가격은 5만 동, 굳이 예약할 필요 없음. 기차에서 내려 눈치껏 호객 행위하는 사람을 찾으면 됨.

7. 8-9시부터 2-3시(불확실) 정도까지 하는 라오차이-타반 마을 트래킹 투어 호텔 제시가는 18달러.

8. 힐스테이션 델리&부띠끄 음식은 형편없고, 힐스테이션 시그니쳐는 꽤 괜찮음.

9. 함롱산에서 내려다보는 사파 시내가 아름다움.

10. 사파 시내에서 깟깟마을로 가는 길에 있는 카페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아름다움.

11. 11월은 습하고 추움. 나는 정장 겉옷밖에 없어서 속옷, 티셔츠, 유니클로 히트택, 초경량 패딩, 후드 5겹을 겹쳐 입었고 따뜻했음. 트래킹 하면 더워짐.

12. 호텔은 난방이 잘 안되니 겨울에 가면 수면 양말, 수면 바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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