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토리아, 맥주 축제에 다녀오다
남아공은 소문만큼 맥주와 와인이 넘쳐흐르는 곳이긴 하나, 차가 없는 내가 이 곳에서 맥주를 사는 건 꽤나 번거로운 일이다.
마트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맥주가 없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와인을 제외한 모든 주류는 주류 전문상에서만 취급한다고 한다.
마트에서 맥주를 살 수 없다니!
서울처럼 걸어서 편의점이며, 마트며, 치킨집이며 갈 수도 없으니, 주류상에 가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고작 맥주 하나 사자고 우버를 부르기는 기분도 주머니 사정도 좀 애매하다.
반면 좋은 와인을 저렴한 가격에 사는 것은 굉장히 쉽다. 어느 마트든 와인 코너가 꽤 크게 있고, 수많은 와인 가운데 무엇을 사야 할지 잘 모를 때에는 와인 코너에 있는 마트 직원에게 물으면 된다.‘레드/화이트/스파클링 중에서 뭘 찾는데?’부터 시작해서 ‘단 게 좋아, 드라이한 게 좋아?’하며 나의 취향을 파악해서 와인을 추천해 주는데, 이렇게 직원 추천해서 산 와인 중에는 실패한 것이 없다.
한국과는 다르게, 이 곳에서는 와인이 고급스럽거나 사치스러운 아이템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소주나 맥주를 찾는 것처럼 이 나라 사람들은 맥주나 와인을 찾는다.
요리용으로 사용할 저렴한 와인을 찾는 아주머니부터, 가족들과 함께 마실 와인을 고르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 나 같은 뜨내기 외국인까지 쉽게 사고 쉽게 마시는 것이 와인이다.
맥주에 목마른 자들을 위한 단 하루의 천국
맥주를 썩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딱히 할 것 없는 이 동네 맥주 축제를 한다는데 빠질 수는 없었다.
요하네스버그에서는 1시간 정도 떨어진 프레토리아에서 맥주 축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참 전에 참가 티켓을 끊어두었다. 평소 요하네스버그에서 프레토리아까지 갈 일이 거의 없어서 멀리 나들이를 하러 가는 기분이었다.
그 김에 처음으로 하우트레인도 타봤다. 우버로 가자니 도저히 계산이 안 나와 난감해하던 차에, 그나마 약간 저렴한 하우트레인이 프레토리아까지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우트레인의 시설은 오히려 파리, 로마, 런던, 뉴욕의 지하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배차 간격이 30분 정도라는 것이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자리도 여유롭고 상당히 안전하게 느껴졌다. 좌석은 지하철보다는 ktx 같았다.
축제에 도착하니 온 동네 숨어있던 백인들이 모두 모인 느낌이었다. ‘남아공에 이렇게 백인이 많았던가? 싶을 정도로, 축제에 온 90% 이상이 백인이었다.
동양인이라고는, 내가 속한 무리와 건너 건너 알게 된 팀이 전부였으니, 그 많은 사람 중 기껏해야 10명 정도였다. 축제가 무르익고 약간 어스름해질 때쯤에는 흑인들도 좀 볼 수 있었지만, 그래 봐야 10%도 안 되는 듯했다.
그렇다고 딱히 그 안에서 나만 동양인이라는 이질감,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남아공에 와서 신기했던 건 생각 외로 사람들이 나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내가 지나가도 별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아공에서 동양인을 지나칠 때 서로 시선이 잠깐 머무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 안에 속해 있는 것이 별로 불편하지 않다. 가끔 “차이나!”라며 장난스럽게 말을 거는 흑인 아저씨들이 있긴 하지만 보통은 별 다른 눈길도 주지 않고 서로 지나쳐 간다.
베트남에서는 오히려 훨씬 많이 눈길을 받았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쌀국수 한 그릇 잡수는 동네 처녀 총각들이 나와 그 무리가 지나가면 그렇게 쳐다보곤 했다. 같은 동양인이면서 묘한 이질감을 풍기는 것이 주변 사람들을 더 신경이 쓰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시티투어를 다운타운으로 다녀오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자세한 건 시티투어 편에서 다루는 것으로...
축제에 도착하자마자 맥주보다는 먹을거리에 눈이 갔다. 아침을 안 먹고 온 탓에 열두 시간 넘게 내 배는 텅 비어있었고, 맥주고 뭐고 일단 식사부터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장하자마자 받은 코인을 맥주잔으로 교환하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손에 쥔 커다란 맥주잔을 빈 잔으로 들고 돌아다닌다는 것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우선 잔을 채우고 배를 채우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첫 잔은 Smokey Bacon Beer로 채워졌다. 훈제 베이컨 맥주를 마시기 전 Honey Weiss를 시음하고 나니 나의 선호는 더욱 확실해졌다.
이번 축제의 가장 큰 소득은 맥주에 대한 취향을 파악했다는 것인데, 나는 가볍고 상큼한 향보다는 구수하고 묵직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이날에서야 명확히 알게되었다.
이어서 다른 브루어리에서도 이런 흑맥주 계열로 고르니,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다. 전에 IPA를 추천받아 마시면, 처음에 입에 들어올 때 꽃처럼 피어나서 상쾌하긴 하지만 몇 모금 마시다 보면 씁쓸한 끝 맛이 좀 거슬려 마시기 힘들었는데, 흑맥주의 무거우면서도 부드러운 맛은 취향저격이었다.
그러고 보면 커피 취향과 맥주 취향은 같이 가나보다. 커피도 꽃향기 날리듯 화려한 향보단 묵직하고 단맛이 진하게 퍼지는 구수한 걸 좋아하는데, 맥주에서도 이런 취향이 나타날지 몰랐다. 알았더라면 더 일찍 흑맥주의 맛을 알았을텐데.
잔을 채우고 나니 마음이 한결 든든해져 먹을 것을 파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보기 힘든 해산물 파는 곳에서부터, 양고기를 통째로 바베큐하고 있는 곳, 쿠바 음식을 파는 곳 등 생각보다 꽤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그중 내가 선택한 곳은 축제에서 가장 크고, 가장 눈길을 끌던 초록 트럭이었다. 가고 나서보니 퓨전 아시안 스타일 음식을 팔고 있어 역시 나는 내가 온 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싶었지만 아무튼 음식은 아주 훌륭했다.
축제에서 재미있는 언니도 만났다. 한 언니가 어떤 맥주를 먹을까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나를 붙잡고 “같이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어?”하며 말을 걸었다. 나는 “문제없지! 좋아!”하며 같이 사진 찍는 포즈를 취하면서, 장난 어린 물음을 던졌다.
“근데 왜? 내가 동양인이라?”
라고 하니, 당황해하며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오늘 생일이고, 기분이 너무 좋고, ……
네가 입은 노란색 재킷이 너무 맘에 들어!
어디서 산 거야? "
라길래 씩- 웃으며 나의 나라 한국에서 산거라고 답하니 언니는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듯 대화를 이어갔다.
“나 여행하는 것 너무 좋아하고, 여행자도 좋아해! 다음에 꼭 연락해 나는 프레토리아 살지만 혹시 오면 구경 도와줄게!”하는 말을 남기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이 언니 이후로 같이 사진 찍자는 사람들한테는 내가 동양인이라 찍는 거냐는 장난스러운 질문은 좀 짓궂은 것 같아서 접어두었다.
거의 매 시간마다 공연이 있었다. 내가 꼽은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Bad Peter의 공연이었다. 노래도 연주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을 흥겹게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라 더욱 좋았다.
공연을 하는 사람과 공연을 보는 사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흥에 겨워 춤판이 벌어졌다.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맥주 페스티벌은 상당히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오는 축제였다. 가족끼리 와서 의자에 앉아 뜨개질하는 할머니도 있었고, 진정한 맥주 마니아처럼 보이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대부분 젊은 연령이긴 했지만, 연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 친구, 회사 동료 등으로 보이는 그룹도 많았다.
돗자리에 앉아, 벤치에 앉아, 혹은 그냥 흙바닥에 앉아 하루 종-일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 그렇게 여유로워볼 수 있었다. 대낮에 공원에서 술과 사람과 음악이 어느 것 하나 모나지 않게 어우러지는 것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