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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Aug 10. 2024

대화와 변화

대화對話.

누구와의 관계든 대화가 중요치 않을 수 있을까? 대화를 통해 상대방과의 교류를 지속할지 하지 않을지, 어떤 두께와 깊이만큼 어떤 색채의 감정으로 상대방을 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대화는 나의 성격, 인품, 됨됨이를 드러내는 방식이고, 그 방식부터 내용까지가 영혼을 화장하는 방식이고, 영혼을 드러냄 자체가 되기도 한다.

처세, 인간관, 세계관, 도덕, 성격, 태도, 자세, 시각, 심미안, 취향, 혐오, 미학, 신앙, 예술 등. 한 사람이 정신적으로 양분을 삼은 것, 사유하고 경험하고 동경하고 상상한 것 모두가 그 사람의 영혼을 구성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영혼이란 사람이 죽었을 때 갑자기 줄어든다는 몇 그램의 질량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구성하는 정신적인 요소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주로 친구들 앞에서는 내 영혼을 화장한 채로 대화하는 편이었고, 사귀는 이성 앞에서는 화장하지 않은 내 영혼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 대화했다. 교우관계에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영향을 미쳤던 탓에 약간은 방어적인 면이 있었는데, 연인에게는 방어하지 않고 폭주하듯 드러내고 싶어 했다. 생각이 쓸데없이 많고.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나는 이런 식이다. 한 친구가 곧 해외로 발령받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나라로?

하고 물었다. 친구는 동남아에 있는 국가를 말했다. 나는 간격을 두고 '오'라는 작은 감탄사를 내며, 다음 할 말을 생각하는데, 그 사이에 다른 친구가 먼저,

-와, 좋겠다. 난 휴양지가 좋아.

라고 말한다. 이 대화에 여전히 나는 끼고 있고, 계속 껴 있고 싶다. 하지만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오고 간다. 휴양지, 좋지. 나도 해외여행을 다녀온 곳이 전부 휴양지였다. 인도네시아의 발리, 태국의 방콕, 미국의 하와이. 따뜻한 기후, 그 기후를 따라 난 재료들로 만들어진 음식. 방콕의 팟타이는 어디에서 사 먹어도 맛있었지. 방콕이 휴양지인가? 그런데, 저 친구가 휴양지를 좋아하는 게 이 친구가 발령받는 것과 같은 정서가 아니지 않나? 휴양지를 즐기러 가는 것과, 유명한 휴양지를 낀 나라에 일하러 가는 것은 다르지 않나? 아니, 그래도 근무하는 동안 휴양지를 쉽게 갈 수 있으니 좋겠군. 그래, 결론은 좋겠다, 게 내 결론이다.

이 생각이 끝날 때쯤이면 대화의 화제는 이미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다. 나는 후회한다. 아차! 아까 저 친구가 휴양지가 좋다고 했을 때 '나도'라고 바로 말했으면 대화에 적절하게 참여하게 될 것을!


사귀는 남자와 대화할 때, 나는 나에 관해 많이 떠들었다. 친구들 앞에서 '계속 친구로 지내도 괜찮은 주영이'가 되기 위해 적당히 검열하던 나를, 연애 상대에게는 최대한 검열하지 않고 드러내느라, 나는 폭로하듯 나에 관해 말했다. 말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전부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나를 알려야만 했다. 상대방이 나의 전말을 대강이라도 파악하기를 바랐다. 그가 파악한 나를, 내가 드러낸 나를, 마치 존 레전드의 노랫말처럼, 아름답게 여기고 안아 주기를 바랐다.

'Love your curves and all your edges

All your perfect imperfections'

사랑해, 당신의 부드러움과 날카로움 전부를.

당신의 완벽한 불완전함을, 모두.

내가 받는 사랑이 저 노랫말 같은 사랑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내 curve, edge, imperfection을 모두 드러내야 했다. 초라하다고 느꼈던 순간의 기억, 싫어했던 인간, 나쁜 짓을 당한 경험, 내가 나쁘게 굴었다고 생각하는 일, 어떤 점에서 죄책감을 느는지, 어떤 인간을 싫어하는지도. 내 자랑도 꽤나 했다. 무슨 칭찬을 받았었는지, 무엇을 잘했는지, 가족과 친구에게 무엇으로 사랑을 표현하는지 등. 나를 아는 이가 여러 명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내가 폭로하는 바로 지금의 나'를 괜찮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운이 좋았다. 호감을 주고받고 그를 나의 남자로 삼을 때까지 나를 까발릴 때마다 상대들이 내가 소망하던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 주었다.


받고 싶은 사랑을 받긴 받았는데, 관계를 어떻게 꾸렸던 건지 결국은 이별했다. 러자  내가 지겨워졌다.

고 싶은 사랑은 정해져 있었는데, 내가 주고자 하는 사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정의할 수 없었다. 돌이켜봐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뾰족이 무엇을 주었던가? 내가 상대에게 어떤 종류의 행복을 주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해받고 싶은 만큼 이해받는 것으로 사랑을 향유했다. 상대방은 나의 사랑에서 무엇을 향유했을까?

다음 인연을 만나면, 내가 받고 싶은 사랑보다 그가 받고 싶은 사랑에 신경 써 보자는 물렁한 다짐을 하고 나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나에게 먼저 말하고, 먼저 묻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던지는 질문에 따라 나를 알려 주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관계를 엮어 나가게 되었다는 점에, 나 자신에게 만족했다. 내가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를 알리는 방식도 바꿨다. 나의 사유를 모두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을, 무엇을 겪으며 이런 내가 되었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렸고 함께 하는 경험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렇게 사귄 관계가 가정을 꾸리는 데까지 이르다니, 처음에는 내가 자아의 일부를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자녀를 낳아 자아가 나를 초월한 세계로 확장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예전에는 내게 대화의 힘이 강력했다. 두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 데이트를 해도 상관없었다. 매일 밤이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통화하며 관계를 다져나갔다. 대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내가 갈증 내는 애정 욕구는 반 넘게 채워졌다. 취업을 준비하던 20대 중반, 적당히 치기 어린, 적당히 배운, 꽤나 어설픈 녀석들끼리 사형제도나 인권 개념을 두고 논쟁을 하고 정당정치가 어쩌고 떠들기도 했다. 물론 허튼소리나 유치한 다툼은 더 많았다. 만나면 함께 열심히 걸어 다녔다. 걸어 다니면서 또 대화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헤어지고 나니 그게 허망했다. 그 길고 길던 대화들이, 시간을 따라 물처럼 흘러 그저 가 버렸다. 그렇게 생각을 몸보다 많이 섞어도 삶이 섞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별을 반복해도 납득이 안 가더라. 그것은 상대에게 애정이나 미련 같은 감정이 남았느냐 하는 것과 별개로 존재하는 물음이었다.


남편과 나는 이 세상에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거의 매일 만났다. 경치가 좋은 곳, 예쁜 꽃이 피는 곳, 맛집, 분위기 좋은 카페. 무난한 데이트코스를 반복해도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재미와, 발견한 곳에 정 붙이는 재미가 있었다. 매일 전화기를 붙잡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생각을 나누는 것도 재미있지만, 매일같이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며 같은 경험을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하는 것은 전화기를 붙잡고 '시간'만 공유하는 것보다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컸다. 나는 이때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함께하기'보다는, 시공간을 공유하는 '함께하기'에 더 무게 실렸다. 선험이 경험을 늘 앞서고 능가했던 나의 세계는 다른 균형점을 찾기 시작했다. 더 많은 경험에 기우는 쪽으로.


남편은 나의 변화에 맞아떨어지게 맞닥뜨린 새로운 충격이었다. 관계의 양상에 조금 집착하던 나는 내가 기를 쓰고 상대방과 대화하려 애쓰지 않고도 순조롭게 진전하는 관계란 것이 있다는 게 얼떨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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