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고충의 이해
할 말이 너무 많다. 그래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눈을 떴다. 자꾸 내 몸을 타고 굴러다닌다. 아이들끼리 서로의 몸을 깔고 뒹굴면서 소리를 지르고 칭얼거린다. 그러지 말라고 한 마디 던진 뒤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좋은 엄마는 아니야. 아이들이 일어난다고 내 몸도 번쩍 일어나지지는 않는 걸 보니. 몰라, 내가 깰 때까지 너네도 알아서 계속 자면 좋겠어.
아이들이 다시 구른다. 내 배 위로, 오케이. 머리 위로, 아 그래, 해 봐. 그런다고 내가 깨나. 구르다 말고 손에 잡히는 대로 내 몸을 꼬집는다. 아, 진짜... 심심한가 보네. 내 몸에 닿은 아이들의 몸이 끈적끈적하다. 어제 자정이 되도록 기온이 30도 근처였다. 새벽 두 시가 되도록 나는 에어컨을 끄지 못했다. 그래도 새벽에 우리 몸은 더웠나 보다. 끈적끈적. 더운 공기가 방에 감도는 게 느껴진다. 이제 눈 감기는 글렀다. 아이들과 눈을 조금씩 마주친다. 내 눈동자를 본 아이들이 이제 더 신나게 내 몸에 올라탄다. 큰애가 손가락을 곰질곰질 움직이는데 내 젖꼭지가 잡혔다. 야, 젖꼭지? 제발...
머리맡에 전화기를 두고 잤었는데 어디로 갔나? 침대를 더듬다 보니 내 등 아래 전화기가 깔려 있다. 몇 시인지 확인한다. 6시 12분. 얘들아, 난 한 시간은 더 자야 해. 우리는 더 잘 수 있어. 왜 가능성을 저버리고 이 길을 택한 거니? 대체 몇 시에 깨어난 거야? 이것이 바로 강제 미라클 모닝이다. 내가 일어났다는 게 미라클이다. 그 이상의 기적은 바라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키니 아이들이 저마다 자기를 안아달라고 조른다. 아니 이 코딱지만 한 집에서 방과 거실 사이 몇 걸음이나 된다고 안아달래? 너희들 몸으로 움직여야지. 한 명씩 안아다 거실로 데려다준다. 목을 축이라고 물 한 잔, 분유 한 병씩 들려준다. 이 과정도 원활하진 않았다. 손이 떨어지기만 하면 우는 작은애를 안은 채로 분유를 타다 보면, 기다리지 못하고 분유통을 손으로 건드리는 아이 덕분에 식탁이나 바닥에 분유가루가 꼭 흩뿌려진다. 숨 쉬는 대로 손 뻗는 곳마다 오염이 발생하는 즐거운(?) 생활.
고맙게도 남편이 밥을 안쳐놓고 갔다. 취사가 완료되는 알림이 들린다. 큰애가 새로운 과자를 발견했다. 제주도에서 유명한 샌드쿠키다. 남편이 사무실에서 나눠 받은 걸 가져왔나 보다. 언제 먹었던 걸 기억하는 것인지, 보자마자 내게 과자를 까 달라고 한다. 구내염과 중이염으로 약을 끊임없이 먹는 게 안쓰럽고 편식도 심한데, 과자를 먹겠다니. 과자를 까 준다. 내 손으로 과자를 들어 달라고 하는 걸 거절하는 것이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너, 내가 각 잡고 키웠으면 그 나이에 과자를 제 손으로 안 들겠다는 응석 따위는 꿈도 못 꿨을 거야.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런 생각도, 많이 해 봤자 좋을 게 없다.
큰애는 과자를 깨물어 먹는 데에 아직 서투르다. 과자 부스러기가 사방에 튄다. 작은애가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든다. 바닥에 떨어진 거 먹지 마. 지지! 먹지 마. 크림 묻은 것도 먹지 마. 넌 아직 돌도 안 되었잖아. 땅콩잼도 아니야. 애초에 쿠키부터 네가 먹기엔 달단 말이야. 먹지 말라니까.
밥에 얹어 줄 계란프라이를 굽다가 다시 눈을 돌려 보니, 작은애의 손에 흰 크림이 흥건하게 묻어 있다. 어디서 저런 조각을 주웠어? 이건 물티슈를 써야 한다. 손을 박박 닦아 준다. 보통 작은애는 손에 든 먹을거리를 빼앗기면 몸을 뒤로 뒤집는다. 부엌은 좁고, 제 분한 대로 머리를 뒤로 젖히다가 밥상이나 냉장고에 머리를 부딪칠 수 있으니 내 손은 쿠션이 되어 줄 준비를 항상 하고.
어렵게 식사를 시작한다. 큰애 밥에 계란 프라이를 올려 비벼준다. 아이는 숟가락으로 밥을 떠 먹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 나한테 밥을 떠 달라고 한다. 네가 떠먹어라, 떠먹어라. 잔소리와 도움을 번갈아 준다. 나도 밥을 먹는다. 나는 큰애와 똑같은 밥인데 낫또를 얹었다. 돈을 주고 샀는데, 상하기 전에 먹어야 하지 않겠나? 같은 의미로 삼치구이도 데웠다. 이건 작은애가 좋아한다. 손으로 통째 잡고 갈비처럼 뜯어먹을 수도 있기 때문에, 얌전하게 포크로 찍어 먹을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이 식사는 결국 자기 밥 아닌 모든 음식에 손을 대는 작은애가 밥, 계란, 낫또, 삼치를 골고루 묻힌 손으로 내 어깨를 짚으며 걸음마를 연습한 뒤 유유히 오빠가 노는 장난감을 따라 만지러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내 목덜미에서, 낫또와 삼치 냄새가 난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 이토록 나의 아침을, 육아하는 아침을 자세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어디에서도 오지 않는다. 오직 내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때에나 말할 수 있다, 내가 정말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발단-전개-절정이 갖춰지지 않는 사건의 연속, 긴장과 이완 없이 온통 '오, 저런, 맙소사!'라는 반응이 이어지기만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나는 그런 피로를 나와 만나는 사람에게 안겨주고 싶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나의 이야기를 덜기 위해 노력하고, 안 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만큼 나도 참고 있다. 사실은, 솔직한 내 심정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하고 싶다! 그래서 누군가가 아주 참깨 같은 관심으로 '어때?'라고 물으면, 나는 잔뜩 부푼 봉선화 씨방 터지듯 모든 것을 술술 터뜨려 말할 수도 있다.
또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보다 더 한' 육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도 있다. 내 기분이 어땠을지 공감한다고 표현하기 위해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자기 경험은 아니어도 '네 이야기는 내가 들은 육아 에피소드 중에서는 레벨이 그나마 낮은 편이구나' '충분히 자극적이지 않는구나' '너보다 더 한 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단다'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나는, 공감이나 훈계나 어떤 메시지도 수신하고 싶지 않다. 그냥 순수한 이해를 받고 싶다. 그래서 더욱 말을 아끼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고르라면 공감하는 게 더 좋다. 그런 대화는 돌아선 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매일 이런 식으로 보내게 되는 하루하루를, 육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알까? 그럴 리 없다. 나 역시 이런 식으로 육아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아침을 모른다. 매일 아침 컵에 든 물을 쏟으며 식사를 한다는 건 남편마저도 모른다. 몇 년만 지나도 나 또한 잊게 될 것이다. 신생아가 얼마나 자주 먹고 자주 잠드는지를 벌써 잊은 것처럼, 아이가 통잠 자기를 기다리며 새벽에 토막잠을 자는 시간이 얼마나 괴롭고 피로한지를 벌써 잊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육아는 지금 이 시기를 똑같이 지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가장 편하다. 그다음으로는 이 시기를 이미 겪은 육아 선배들이 편하다. 그다음으로는 조카를 두었거나 반려동물을 두었거나 주변에 육아하는 가정을 많이 알고 지내는 사람이 편하다. 이 범주에도 들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으로 둘로 나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삶을 바라는 사람과, 원하지 않는 사람. 이쯤 되면 대화에 '육아'라는 주제를 거의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이 사람들이 육아에 대해 알아도 병이 되면 되었지, 벌써부터 약이 될 것 같지는 않아서다.
아이 둘이 동시에 응가를 해서 한 명씩 물로 씻겨 주었다. 그럼 다음은 새 기저귀를 입힐 차례. 작은애 먼저 로션을 발라 주고 기저귀를 입히는 동안, 큰애는 혼자 거실에 나가 놀았다. 큰애 몫의 로션을 손에 새로 덜고, 기저귀 한 장을 들고 거실로 갔는데, 놀이매트 위에 새로운 똥이 '안녕하십니까?'를 냄새로 구사하고 있었다. 음, 이런 이야기를 아이 낳고 싶은 사람에게 해 줄 것인가? 아이 낳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해 줄 것인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낫겠지. 그러므로 내가 그런 상황에서, 일단 바닥의 똥에 작은애가 접근하는 것부터 확실하게 차단하자는 기민한 판단을 하고, 아이를 쏘서에 억지로 앉혔으며, 원치 않게 쏘서에 앉은 아이가, 싫다고 집안이 떠나가라 우는 동안, 새로운 똥을 내놓은 큰애의 궁둥이가 거실의 다른 어디에 닿기 전에! 얼른 낚아채 화장실로 들어가 물로 씻기고 로션 바르기와 기저귀 새로 입히기라는 일상의 소소한 과제를 해치운 보람찬 이야기는, 영원히 나만 아는 작은 추억으로 남기고 마는 것이다. 이 긴박한 과정을 그저 '기저귀 갈기'라고 부르며.
똥은 어떻게 치웠냐고? 휴지로 손에 집어 변기에 갖다 버렸다. 손으로 똥도 집고, 청소도 하고, 애들도 씻기고, 향긋하게 로션도 발라 준다. 도구를 찾기 전에 손으로 해결하는 일이 점점 는다.
집게로 똥 묻은 휴지를 들고 "너무 싫어어!"라고 엄살을 떨던 시절이, 내게도 있긴 있었다.
아기가 처음으로 내 머리칼을 쥐던 날, 회사에서 아기에게 머리채 잡힌 이야기를 네 번을 똑같이 반복해도 지겹지 않았었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아기에게 머리를 잡히더라도, 당기는 힘이 워낙 세서 눈이 번쩍 떠지도록 아프더라도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침착하게 해결할 수 있다. 무덤덤하고 차분한 대응은 그렇게 여러 번 당하고서야 만들어진다. 때로는 일부러 소리를 지르며 반응한다.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아이도 사회화가 될 테니.
매일 짜릿한 일들이 계속되는 것이 육아다. 때때로 순간적으로 할 일이 너무 많이 생기고, 두 아이를 동시에 안으면 정말로 허리와 팔이 뻐근해진다. 셋? 아이 셋을 어떻게 키우는 거지? 다른 가정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은 뇌를 그저 스쳐 지나간다. 아침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내가 퇴근한 기분이다. 정말 쉬고 싶다. 등원 후 출근할 미래가 두렵기도 하다.
이런 모든 것을 육아하지 않는 사람과 공감하기 어렵고, 알아서 짐작하고 배려해 주기를 바라기는 더욱 어렵다.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내가 나를 주장하는 수밖에. 그러면서 나는 바깥의 타인들과, 기꺼이 몰이해로 부딪치고 무관심의 벽을 세우거나 심하게는 갈등도 겪게 되는 것이다.
휴직 전, 내가 소속된 부서는 25명의 부서원 중 30대 직원이 9명 있었다. 30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골고루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결혼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인생에 가장 크게 배워야 하는 부분이 육아였던 나로서는, 결혼하지 않고 애 낳지 않은 30대 동료들과는 대화할 이유가 많지 않았다. 일 이야기? 물론 나보다 먼저 임용된 이들이니 업무 선배이고, 그들에게 배우고자 하면 배울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은 팀장님과 대화하며 많이 해결해 나갔다. 업무에 관해서는 정말 필요한 정보 공유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팀장님과 나는 사적인 대화를 많이 하지 않고도 업무에 관해 충실히 대화할 수 있는 사이였다. 30대 동료들과도 일에 관한 대화를 하라면 할 게 너무 많았지만, 결재라인이 아니다 보니 책임이 없고, 그러니 그런 대화를 안 하려면 영 안 할 수도 있었다.
부서의 30대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는 다양했다. 새로 나온 향수, 머릿결 관리법, 피부과, 옷, 휴가지, 정치 뉴스, 입술 관리법, 유행하는 술, 예쁜 직원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 등. 나도 좋아했던 것들이긴 하지. 대화에 끼려고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그건 내가 당면한 삶의 현안이 아니었다. 뒤돌았다 다시 보면 어느새 쑥쑥 자라는 아이가 있는 와중에, 둘째 임신으로 몸이 점점 불어나고, 넉넉한 원피스로 겨우 복장의 적절성을 갖춘 채, 걸어서 통근하느라 땀과 바람에 찌든 꼴로 출근하는 내가 섭렵하고 있을 만한 화제가 아니었다. 원래 남에게 별 관심을 안 갖고 싶은 성격인 데다(나의 관심은 거의 나만을 향한다), 내 삶의 문제가 더 중요해진 상황에서 그런 대화는 귀에 잘 안 들어왔다. 내가 끼어들지도, 나를 끼어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40대의 결혼하고 애 낳아 기르는 사람들과 자주 대화했다. '육아자들의 대화'는 한 번 물꼬를 트면 걷잡을 수 없었다. 다양한 화제와, 그 화제에 관한 이론, 사례, 경험을 공유하다 보면 시간이 살살 녹았다. 사무실에서 나는 좁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육아라는 어마어마한 블랙홀이 있었다. 그 블랙홀 안에 아이라는 우주가 있었다. 그리고 이 블랙홀은 종이의 앞뒤처럼 화이트홀이기도 했다.
'삶이 지루할 때, 아들을 낳으십시오.' 누군가가 자기 아이의 놀라운 장난을 SNS에 게시하며 덧붙인 말이다. 그렇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아들? 아니, 아들이 아니라 모든 '아이'가 그렇다. 삶이 지루하다면, 아이를 낳아 보라.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맛집을 찾기 위해 지도를 켜던 사람이, '아기의자'가 있는 식당이나 카페를 찾기 위해 모든 웹 플랫폼을 뒤지며 정보 수집을 하게 된다. 머릿속에 새로운 사회적 지도를 그려야 한다. 아이 친화적인 상업공간과, 아닌 공간을 나누면서, 유아차가 다니기 쉬운 길과 아닌 길을 구분하면서. 남들은 알 수 없다. 손으로 똥을 씻기는 게 익숙해진다는 것, 머리채를 잡혀도 눈 하나 꿈쩍 않게 되는 것, 수챗구멍에 밥풀과 머리카락이 같이 뒤섞여 있는 꼴에 비위가 상해도 담담해지는 것, 아이가 토를 하면 자연히 토를 받으러 손이 나가게 되고, 맨손으로 어떤 물질이나 사물을 만지는 데에 주저할 시간이 없어지는 마음가짐을. 누가 나를 기억하겠는가? 그렇게 깔끔을 떨고 새침을 떨고 포크에 찍을 고기조각마저 예쁘게 정돈해야 입에 집어넣고 음식을 씹는 모양마저 조신하려 애를 쓰고 쪼그려 앉을 땐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려 노력하던 나를.
정말로, 갈수록 우악스러워져 가는 나를 느낀다. 어떤 드라마에서는 밥 먹는 모습이 보기 싫다고 말하며 헤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정말로 정 떨어지면 숨 쉬는 것도 싫고 먹는 꼴을 보아도 싫기는 한가 보다. 그런데 그게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꼴이 흉해서 미울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다. 요즘은 숟가락에 밥을 넘치게 퍼 담는다. 젓가락에 반찬이 조금 많이 잡혀도 덜어내는 대신 그냥 입으로 밀어 넣으려고 든다. 아이랑 밥을 먹다 보니 내 입에 넣는 게 조급해지고, 조급하다 보니 가릴 게 없어지고, 덜 가리다 보니 더 많이 흘리고, 실수한다. 나는 남편이 내 먹는 꼴을 보기 싫다고 말할까 봐 두렵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스스로 '아차'싶은 순간도 있지만, 이제는 '아차'도 안 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제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는 조금 두려워진다. 내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같이 밥 먹기 싫은 사람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할 때가 있다.
어느 날은 친정 가족들과 모여 막국수에 만두를 먹었다. 아이와 씨름하다 만두를 구강이 허락하는 한 양껏 베어 먹는 나를, 한껏 새침 떠는 예쁜 아가씨로 살고 있는 내 여동생이 보았다. 몇 년 전, 내가 교정기에 낀 고무줄을 빼는 모습에도 '으윽'이라고 반응하던 그녀였다. "제발 화장실 가서 해결하고 와 줄래?"
여동생이 나를 어찌 보았을까 조금 의식하던 마음에, 이런저런 말끝에 내가 먼저 "점점 내 먹는 모습이 우악스러워지고 있어" 했다. 여동생이 오히려 "애 키우느라 그러지."라고 말한다. 짧고 산뜻한 그 말에, 내가 바라는 이해는, 딱 이 정도면 되는구나 싶었다.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을 말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그저 '안 그러던 내가 왜 이러지'라는 자괴감이나, '안 그러던 애가 왜 저러지'라는 탄식 없이, '한참 그럴 때지'라고, 계절을 말하듯 여기고 마는 정도로 함께 지나가고 마는 것. 그 정도의 이해면 나 자신에게도, 친구에게도, 충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