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를 쓰고 대화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상관없이 가까운 관계라는 게 나는 아직도 이상하다.
관계가 끝나간다는 신호가 바로 그것이지 않나? 대화에 소홀해진다는 것. 상대방의 생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
남녀가 만나 처음에는 미주알고주알 대화하느라 잠들 때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도 서로 아쉬워하곤 하는데, 헤어질 때가 되면 대화는커녕 습관적인 안부 문자에 'ㅇㅇ'이라는 자음의 대화가 간간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그게 편해진 것이라고, 익숙해진 것이라고도 한다. 나는 그 정도로 익숙해지는 관계를 만들어본 적 없다.
처음에는 대화를 잘했다. 남편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는 내가 동물을 키우고 싶어 하는지, 오이를 좋아하는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내가 즐겨 듣는다는 노래를 기억했다가 그가 노래방에서 불러줬다. 오이는 본인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책을 좋아한다고 함께 서점에 가 주었고, 책을 구경하다가, 책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게 되기도 했다.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서로 꺼내고 비교하고 붙여보고 하면서 결혼까지 했다. 저녁을 먹고 산책하는 시간, 잘 준비를 하고 누운 시간에 나누던 대화들이, 갑작스러운 결혼에 확신을 조금씩 채울 수 있게 해 주었다. '대화' 자체는 아주 중요했다. 나에게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다.
아이를 키우느라 바쁘다는 게 이유라서, 지쳤다는 게 이유라서, 시간이 부족해서... 특히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 물리적으로 대화를 줄였다. 육아에 저녁시간을 바치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둘이 대화한다는 건 다른 종류의 소진이 밤까지 계속된다는 뜻이었다. 타인에 할애할 에너지를 고갈한 상태인 줄을 서로 알기에, 우리는 수고했다는 인사를 주고받은 뒤 각자의 핸드폰에 집중하다 잠들어버렸다. 분리수면에 실패하면서, 한 자리에 함께 눕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려 해도, 바로 옆에 누워 무슨 유튜브 채널을 보는지 곁눈질로 흘끔 확인할 수 있는 상황과 아닌 상황이 또 달랐다. 어쩌다 나는 야근에 시달려 힘들어 죽겠는데 그가 자투리 시간에 재미있게 봤다는 웹툰 이야기를 하면, 조금은 약이 오르기도 했다. 그런 감정을 숨기고 웹툰 줄거리를 듣긴 했지만, 내가 그 웹툰을 따라 읽지는 않았다.
그나마 첫째만 키울 때에는, 대화의 창구가 있었다. 시댁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소소하게 그날의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다시 돌봄과 집안일의 롤러코스터여서, 그렇게 같이 걷는 짧은 시간이 소중했다. 주말에 다 같이 차를 타면, 아이는 카시트에 꼼짝 못 하고 잠드니, 우리 부부는 각자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를 장날에 마주친 보부상들처럼 떠들어댔다.
첫째가 자라는 동안, 나는 시어머님과 남편의 육아방식과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야근이 많고 정신이 없는 내가 조금씩 보태는 말은 직접 돌보는 수고가 없어서인지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때는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닌 것 같고 나는 자궁만 제공한 사람 같다는 생각에 내적 갈등을 겪었다. 누적된 화는 결국 기회를 만나서 터졌고, 우리 부부는 크게 싸운 적이 있다.
그 다툼은 아이 둘을 돌보고 하루하루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흐지부지 넘어갔다. 내 속에는 찜찜함이 남았다. 싸울 때 서로 입장 차이를, 생각 차이를 확인하긴 했지만 미처 못한 말을 나누는 대화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건 불안했다. 그 상태로 한 주, 두 주 지났다. 나는 그 다툼이 그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을지 모르는 마음에 나와의 결혼이 후회스럽지는 않은지 등을 물었다. 그의 생각이, 마음이 어떤지 궁금해서.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답뿐이었다. 왜 묻느냐는 등 내게 돌아오는 질문도 없었고, 내가 염두에 두고 물었던 부부싸움에 대해 토가 달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안도했다. 후회하지 않는다잖아.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저렇게 그 속을 더 알고 싶어서 캐물었을 때, 어느 날 그는 '할많하않' 표정으로 잠시 뜸 들인 뒤에 말했다.
"아냐. 다 남자가 잘못했지, 뭐. 앞으로 주영이가 하는 대로 전혀 간섭하지 않을 거야."
몇 마디 말로 사태를 마무리하다니 이게 뭐야? 왜, 갈등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우리 둘 사이에 의견을 조정할 여지가 없다고 믿어서? 어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잘 되나 보자는, 등 뒤에 칼을 숨긴 양보, 그런 건가? 그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더 추궁하지 못했다.
그 후 우리 사이에 대화가 제법 줄었고 나는 우리가 몸으로 부대끼는 시간을 늘렸다. 잠자리를 늘린다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지는 않는다. 다만 적당한 주기로 잠자리를 하면 우리가 일면 건강한 부부라는 걸 확인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살 맞대고 부비며 사는 부부가 맞다는 것은 실감 나니까.
정사가 끝나고 나면 잠시 후에 우리는 또 헤어졌다. 각자 맡은 아이와 자기 위해서.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생각을 나누진 못하지만 우리는 같은 순간을 또다시 나눠 가졌다.
어느 날 온 가족이 차를 타고 친정으로 가는 길, 차창 밖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고향 가는 길의 정취를 감상했다.
어느 날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 남편이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된 길, 미안하게도 나는 그 옆에서 잠이 들었다.
어느 주말 우리 가족이 교외의 카페를 찾아가던 길, 나는 차에서 잤다.
건조한 대화를 나누는 관계가 어땠는지를 기억한다. 대화가 건조해질수록 끝을 향해 간다. 남편은 나와 만난 첫날에 무슨 이유로 전 연애가 끝났는지 물었었다. 곱게 설명했지만 좋게 말하자면,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내가 지랄 맞았다. 그리고 하나 더, '대화의 실패'를 겪었다. 속을 터놓는 대화가 실패하면, 그 관계도 끝났다. 나의 연애사는 그랬다. 지금은, 대화가 건조해지고, 줄어들어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는다. 그게 결혼생활이다. 오, 굳건하도다.
이게 맞나? 나는 고민할 필요 없는 것을 고민하는 것일까.
나는 이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우리 부부는 예전에 차에서 아주 많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자 듣던 친구가 말했다. "정말 좋은 거지. 아무 말 안 해도 괜찮은 거, 그게 진짜 편한 사이인 거잖아."
놀랍게도,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오히려 차에 타면 나더러 피곤하면 자라고 권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대화가 줄었다는 걸 이해하고, 내가 피곤하니 잔다는데, 하고 받아들이는 게 마른 스펀지가 물먹듯 쉽다. 대화가 필요하다는 경각심도 긴장도 일말의 불안감도 없다.
나에 대해 알 만큼 알아서 괜찮아진 걸까, 이제 함께한 시간이 있고 삶의 여러 단계를 함께 겪고 있으니 내가 가깝고 편해서일까?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이 떠들어서, 이제는, 조금은, 입 닥친 주영이랑 살고 싶어 졌을까? 어쩌면 그는 나와의 대화에 치이고 있었을까? 피곤했을까?
요즘 나는 발을 다치는 바람에 엄마한테 신세를 지느라 친정에서 지내고 있다. 남편과 아들은 자연스레 시댁에서 지낸다. 저녁을 먹고 나면 짧게 영상통화를 한다. 서로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안부를 나눈다. 그러고 나면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발을 아껴야 해서 외출도 않고 아기도 안지 못하고 되도록 누워 지내고, 남편은 요즘 일이 워낙 바쁘고 힘들다고 한다. 멀뚱히 있다가 그럼 이제 쉬라며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 나면 다시 내 시간이다. 그게 꽤 편안하다.
내가 편안하다고? 이것인가? 바로 이 편안함인가? 이게 바람직한가? 우리 부부는 대화가 줄어도 되는 단계로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친정 식구들과 몇 마디 나누지 않고 함께 앉아만 있어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처럼, 남편과도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남편은 지금이야말로 나와 더욱 긴밀한 가족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연애할 때 대화가 줄면 관계도 느슨해지고 애정이 손상되던데, 결혼은 다른가 보다. 대화가 줄어든 남녀사이인데 헤어진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끈끈한 관계라니 이게 맞나 싶다.
결혼은 정말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