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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Aug 24. 2024

좋은 돈은 다 당신이 가졌네?

난 개털인 채 결혼했고, 여전히 개털이고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기 위해 36년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시작하려니 자괴감이 든다.


결혼할 때 나는 돈이 없었다. 일을 늦게 시작했고, 알바로 번 돈은 생활비로, 용돈으로, 수험생활한다고, 다 써 버렸다. 경제적 보상을 바라고 자식 키우는 거 아니라지만, 기대를 받고 자라서 기대를 넘는 결과를 보여줘 놓고 다시 모든 기대를 무너뜨려 버린 자식새끼였던 나로서는 부모님께 늘 죄송한 마음이 있다. '딸 덕분에 비행기 타겠네'라는 덕담이 우리 엄마 귓가에 오간 적이 있었는데, 아무튼 뭐 됐다. 어쨌든 돈도 없는 주제에 오래 헤매느라 가진 돈이 적었다. 남편과 결혼한 이유 중에 하나가 그는 헤매며 살지 않아서였다. 헤매지 않고 자기 길이다 싶으면 가고, 그 길에서 삶에 필요한 돈과 안정과 지위를 자기 만족할 만큼 얻은 사람. 지나친 욕심을 부리거나 야망을 가지지도 않았다. 착실한 그는 나보다 모은 돈이 많았다. 금액이 뭐 수억을 논할 만큼 크다는 게 아니고, 결혼식을 준비할 때 나보다 더 낼 수 있었다. 이 주제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땐 가벼운 생각이었는데, 막상 쓰고 있는 지금, 여차하면 내가 이상한 결혼을 한 것처럼 비칠까 봐 조심스럽다. 난 팔려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둘 다 엄청 번듯할 만큼 충분히 모아서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냥 상황에 우리를 들이박았다. 가 살던 집에 남편이 옷을 들고 오면서 느닷없이 같이 살았다.


상대적으로 수입이 적고, 결혼하면서 퇴사까지 예정되어 있는 나는 남편과 비교하면 경제적 약자였다. 각자 돈을 내어 공동 생활비를 삼았는데, 나의 퇴사로 그것이 여의치 않아 져서 함께 산 지 몇 달 만에 남편이 가계를 책임지는 모양이 되었다. 한동안 남편 카드로 독서실을 끊고 점심을 사 먹곤 했다. 다행히 얼마 후 퇴사한 회사에서 일을 받아 내 용돈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씀씀이를 빨리 줄이지 않아도 되었고, 적당히 쇼핑하는 재미도 누리고 살 수 있었다. (틀렸다. 저축을 했어야지!)

내 돈 벌지 않고는 못 살겠다는 것을 이때 제대로 느꼈다.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결혼해도 돈 관리는 여자에게 맡기지 않고, 알아서 하고 싶다'라고 못 박았던 사람이기에,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기에, 남편 돈은 내 돈이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대화를 안 해도 그의 돈을 가지고 뭘 어쩔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나도 내가 일해서 먹고사는데 굳이 너를 뜯어먹겠냐,라는 생각을 했고, 나 자신이 적당히 벌 거라고 기대했다. 일 없이 노는 건 잠깐일 것이고, 잠깐이어야 하고. 그래서 신혼에 남편 카드로 커피며 돈가스며 사 먹어도 남의 돈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출근을 안 해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건 아주 편하다만. 회사에서 주는 일감도 받지 않고 수험에 전념하기로 마음먹고서, 달마다 30만 원씩 용돈을 받았다. 없는 주제에 자존심 세운다고 우스워 보일지 모르겠는데, 나로서는 참 겸연쩍은 이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내가 남편의 돈을 함부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주실 거라 생각한다.


정작 내 돈은 함부로 여기는 편이었다. 조금만 돈이 생기면 혼자 살던 습관대로 소비를 했다. 우리 신혼부부의 커플 파자마, 당신의 속옷과 가을에 입을 니트, 내가 입을 바지 등. 저축하고 남은 돈을 쓰는 게 남편의 습관이고, 쓸 만큼 쓰고 나서야 남은 만큼 저축하는 게 나의 습관이었다. 습관의 우에서 내가 졌다. 그리고 남편은 내가 소비하는 것들과 그 가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옷을 그 정도 가격을 지불하고 사는가?' 나 또한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가의 미용실을 다니면서 왜 패딩 조끼는 만 원짜리인가?'

우리는 이런 걸로 네가 그르네 내가 옳네 다투지 않았다. 각자의 돈으로 각자의 마음 따라 하는 짓들이고, 비난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서로 그런가 보다, 했다.

검소한 남편 옆에서 소비를 즐기는 내가 철없어 보일 때도 있었다. 저 사람은 이런 걸 안 가져도 괴로움이 없는데, 나는 왜 못 가지면 괴로운가? 괴로워서 이걸 구매하고, 이걸 구매해서 남은 돈이 적어졌다는 이유로 슬퍼하고. 남편은 내 소비행태를 다소 두려워하고. 그러나 내가 남에게 빚을 지거나 당신 돈으로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아름다운 것에 돈을 쓰고 싶지 않은가? 나는 그러하다.

삶을 쾌적하게 만드는 데 돈을 쓰고 싶지 않은가? 나는 그러하다.


내가 공무원이 되고, 맞벌이 부부가 되면서 생활비는 서로 계산하는 사람이 내는 식으로 과도기를 겪었다. 장보기는 마트에 가는 사람이 내고, 다른 것들은 액수를 떠나 각자 항목을 맡았다. 내가 도시가스를 내고 그가 관리비를 내는 식이었다. 그러다 빌라를 벗어나 겁 없이 아파트를 전세로 들어가면서 나의 암흑시대가 시작다. 남편은 분양받은 아파트의 대출과 잔금 등을 관리하고 있던 시점이라 내가 세 들어 살 집의 계약과 대출을 맡았다. 내가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전세금의 80%를 대출받고 이자를 달마다 내는데 그 금액이 차라리 월세살이를 하는 게 나은 정도였다. 출산 후 이사시점이 되면 전세가가 더 오를지 모른다는 공포로 미리 움직여 계약한 것이 오히려 최고가 거래가 되었다. 이사하고 이자를 내면서 달마다 피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알다시피 9급 1호봉은 공무원법에 의거한 노동착취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금액이다. 내가 임용 후 처음 받은 정규급은 1,123,000원이었다. 근무일수를 다 채운 다음 달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저 돈 같지도 않은 돈에서 이자를 내고 나면 수당을 기다려도 카드값을 메꿀 수가 없었다. 아파트 관리비는 빌라 관리비보다 비쌌고, 통장이 밑 빠진 독 꼴이었다.

"왜 여기에 이사 온 거지? 너무 후회돼."

"다 주영이가 선택한 거야."

남편이 그렇게 말했을 때, 선택이 내 뜻대로라서 책임이 오로지 나의 몫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두어 달을 겪고 힘들다고 하자 남편이 관리비를 맡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리가 무섭게 올랐다. 월 이자를 100만 원 넘게 낸 적도 있었다. 4%대 이자로 개시한 대출이었는데 거의 7%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와, 내가 이 월급으로 저 이자를 버텼다니 정말 대단하다. 나의 객기는 대단하였다. 그래도 때때로 백화점에서 아기 옷을 살 정도로 소비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아이 낳고 정부에서 지원받는 양육수당이나 아동수당 등이 산화했다. 남들은 그대로 통장에 모아 증여신고 착실하게 해 가며 아이에게 준다던데. 미안하다, 아이들아.


가끔, 노후를 위해 얼마만큼 돈을 모으는지 부부끼리 이야기했다. 행정공제회에 월 1만 원씩 납입한다고 하자 남편이 나를 사람 아닌 것 보듯 했다.

"돈이 없는데?"

나는 웃었다. 그게 일류가 하는 행동이라지 않나. 웃어서 일류인지 일류여서 웃는 건지 모르겠다.

벌이에 비해 높은 소비벽, 남편한테 돈 달라지 말자는 강력한 인셉션, 각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로 부담해 온 생활비. 갈수록 나란 사람이 구차해지고, 동료들과 밥 한 번 먹고 커피 한 잔 마실 때 마음껏 나서지 못하고 망설이면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 사회생활이 안 되고 있다.

그래도 그 이자를 버텼다. 그나마 카드 리볼빙에 손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대신에 아버지가 퇴직 기념으로 자식들에게 조금씩 나눠 준 소중한 돈을 까먹었다. 그런 돈은 까먹지 말고 자산이 되도록 굳혀야 하는 돈이다. 나도 그 정도 경제관념은 있다. 있는데...


이를 악물고 절약하지는 못했다. 엄살 반 궁상 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니 2년이 지났다. 어떻게든 이사하려 했는데 실패했다. 분양받은 집은 차익이 눈부시게 기대되지도 않는데, 시장이 얼어붙었다며 팔리지도 않았다. 집주인도 우리에게 돈을 못 준다고 했다. 부동산 경기라는 게 내 삶에 이렇게나 도움이 안 되었다. 남편도 그 집에 매인 돈 외에 우리가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쓸 돈은 달리 없다고 했다. 돈 관리 못하고 순수 노동수입 없이는 살지 못하는 두 멍청한 사람들이 남았다, 딸린 아기 둘과 함께.

한 번 더 이 악랄한 대출상품의 고객이 되어야 한다.


그 사이 지출할 항목은 늘었다. 이의 언어치료비, 어린이집 특별활동비, 등원할 때 입을 옷. 육아휴직하고 식비도 늘었다. 이불을 새로 사도, 그릇 한 장을 사도, 내가 고르고 내가 샀다. 집에서 애 키우기만 하는데 돈은 계속 부족했다. 우리가 쇼핑을 조금 거하게 한 날이면, 남편이

"힘들면 말해. 보태줄게."

라고 말하곤 했는데, 나는 실제로 보태라는 말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몇 달 전에는 정말 힘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남편에게 도와달라고 해야 할 때였다.

"나 백만 원 줘."

"돈 없어."

그는 내가 왜 그 돈을 달라고 하는지 이유를 짐작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의 '돈 없어'는 나의 '돈 없어'와 다르다. 내가 없으면 정말 계좌 잔고가 마이너스라는 뜻이다. 그가 없다는 건 '노후자금과 아버지 차 사실 때 선물할 돈과 친구 결혼식에 낼 축의금준비되어 있지만 네가 돈을 낭비하고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그럴 때 줄 돈은 없어'다.

그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는 잘했다. 아껴 쓰고 저축하고, 그 어디에 나무랄 데가 있는 습관인가.

아내가 힘들어할 때 너무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갔다는 것만 빼면.


경제적인 면으로 그에게 기대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 다음, 다시 말했다. 집 마련을 위해 합쳐놓은 돈 중 내 몫이었던 돈을 돌려달라고. 그는 또 거절했다. 그제야 백만 원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거 한 번 받느니 내 돈으로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거 다 조지고, 나중에 퇴직 후에도 내 돈 떨어지면 내 목숨도 그 시점에 콱 끝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집부린 끝에 결국 '내 돈'을 돌려받아 한바탕 푸닥거리를 했다. 불과 몇 달 만에 많은 돈을 썼다며 남편이 심각해졌다. 수입을 합치고 내게 월 30만 원씩 용돈을 받으라고 권했다. 돈 때문에 남편과 더럽고 치사한 꼴 보고 싶지 않아서 맞벌이를 택한 건데, 무슨 소리야.

사용하는 신용카드은행 계좌의 한 달치 내역을 남편에게 보냈다. 구토하는 기분이었다.


그 후 남편이 돈을 쓸 일을 상의할 때마다 본인이 사겠다고 링크나 계좌를 보내라고 한다. 내 거래내역 한 달 치를 본 감상은 아직도 듣지 못했다. 말 대신 행동을 보니 나를 조금은 이해한 듯도 하다.

나도 내 목돈을 허물어 없애고 나서야 내가 이 결혼생활을 위해 내 손에 쥐는 대로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집을 둘러보면, 내 것이 아닌 것이 거의 없다. 가구 한 점, 가전 하나 헤아려 볼 때마다 내가 산 것, 또는 우리 엄마가 사준 것들이다. 그의 것은 손에 꼽게 적다. 그의 것을 들고 떠나라고 한들 집이 무너질 일은 없을 것 같다. 가 돈을 헤프게 써서, 본인이라도 열심히 모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었다. 그가 열심히 모으고 안 써서, 내가 쓴 것은 아니었나.

남편이 '내가 쓰마'라고 태도를 바꿨다는 사실이 나에게 감동을 주지도 않았다. 조금 서운할 뿐이고, 그냥 나 자신이  많이 짜증 났다. 쨌거나 최선을 다해 앞을 보고 가다 좌표를 확인했는데, 열심히 선택하고 선택해서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이 허탈다.

 

내가 이렇게 나를 거덜 내 가면서 당신과 살아야 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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