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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Sep 07. 2024

나의 엄마 정체성을 찾습니다

내가 낳은 아이, 어머님이 기른 아이

내가 낳은 아들이 있다.

그런데 그는 누구의 새끼인가. 내 새끼인가, 어머님의 새끼인가?

나는 이 글을 읽을 내 남편이 충격받거나 언짢아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일단 그는 내 생각이 어떻다고 해서 충격받지 않는다. 그가 나를 언짢게 여기면 나는 견뎌야 한다. 그가 나와 꾸린 가정을 위해 이미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이 현실을 바꾸지 않았고 나를 바꾸지도 못했다. 편은, 그는 바뀌어야 할 필요 자체를 몰랐다.

나는 내 마음을 돌보련다. 솔직하련다. 다른 사람 말고, 나의 경험과 그걸로 여기까지 온 나를 폭로하련다. 내가 왜 내가 닥친 현실을 싫어하는지, 내 진심은 어떤 상태인지.


연애할 때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아이를 낳으면 키워주겠다고 했어.

나는 깜짝 놀랐다. 생각만 해도 싫었다. 어머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싫었다. 내 아이를 왜 우리가 안 키우고?  

-하지만 난, 내 아이를 우리 엄마가 키우게 할 생각이 없어.

그는 싱긋 웃고 하던 운전에 열중했다. 나는 안도하며 앞을 보았다. 달리는 차 옆으로 길과 풍경이 지나간다. 화창한 날씨 속에서 평소와 같은 다정한 대화를 나눈 한때였다.


그런 대화는 당면한 현실 앞에 말짱 꽝이었다.

결혼 3년 만에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어머님은 눈물을 비치셨고, 점 같은 아기집만 보이는 초음파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주무셨다. 나이를 먹고 장성한 자식이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에 느끼는 어른의 감회란, 아직 젊은 우리가 미처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깊은 기쁨을 아름답고 감사하게 여겼다. 진심이었다.

내가 임용을 앞두고 아이를 기르기 위해 유예를 고민할 때, 어머님은 내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출근한들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돌봐 주마'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는 내가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는데, 집안 분위기가 나의 백수탈출과 임신을 워낙 축하하는 분위기라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고 그저 웃으며 대답을 미루려고만 했다.

아버님께서 '이미 늦은 나이인데 유예라니, 지금 시작해야 하고 아이 때문에 쉬더라도 평생을 일할 테니 주눅 들 것 없다'라고 하시는데 그 말씀을 못 들은 것으로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늦은 나이인 것도 사실이고 돈이 없는 것도 사실이며, 남편이 조금은 근심하는 것도 같았던 게 내가 느낀 바였다. 내 손으로 아이를 돌보겠다고 말하는 게 너무 이기적인 선택처럼 느껴지고, 그럼에도 어린 아기를 어머님께 맡기고 출근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싫었다. 모두가 나에게 이 말 저 말 보태 놓고, '물론 네가 선택하는 거고, 어떤 선택이든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런 뜻은 없었다고 그들이 손사래를 치며 설명해도 소용없다. 나는 그렇게 느꼈고, 그래서 선택했다. 나의 내면에서 원하는 대로, 내 의지와 소망이 이끄는 방향대로 가지 못할 것을 내가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지 않았지만, 새내기인 나는 일도 출산도 다 잡은 행운을 즐기며 머릿속에 꽃밭만 든 사람인 척 출근을 했다.

난 정말 대단한 시부모님을 얻었다. 내 출근을 도와주시느라 매일 아침을 차려주다. 남편의 출근길에 낀 나는 시댁에 내리고, 밥을 먹은 뒤, 시아버지의 출근길에 끼어 출근했다. 임신한 내가 밥이라도 잘 먹고 일해야 한다는 배려, 임신한 내 몸으로 버스를 타고 출근하게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배려였다. 임신한 몸으로 출근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잔인하지 않은가? 앞서 내가 선택했다고 말했지. 그러니 입 다물어야 한다.


태어난 아이가 가족으로부터 얼마나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지 길게 적을 필요 없을 것이다. 그 분위기 속에서 특히 어머님의 마음에 압도당했던 것도 처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어머님의 손주 사랑이 처음부터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던 사실이 내 진심이니 숨길 필요 없을 것이다. 내가 신입사원이라 직장에 적응해야 해서 육아에 신경 쓸 여력이 부족할 거라는 사정은, 어머님에게 호재 같은 거였다. 마음 놓고 손자를 돌볼 수 있는 명분이 되었고, 엄마인 내가 아이를 돌보지 않도록 가로막더라도 명분이 어머님께 있었다. 나를 배려하셔서, 나를 도와주시느라고. 어머님은 덕이 넘치는 분이고 나는 아이를 낳고도 정신 못 차리는 부족한 며느리, 부족한 엄마인 상태로. 어머님의 그늘 아래, 어머님이 지어 주신 밥을 먹으며, 밤이 깊도록 어머님 댁에서 어머님의 수고로 우리 가족이 하루하루를 지냈다.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이 시댁 거실에, 우리 집보다도 더 많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는 '우리 부부가 힘든' 날이면 어머님 손에 목욕까지 마치고 우리 집에서 잠만 잤다. 그럴 거면 우리 집엔 왜 데려가는 것인가. 그럼에도 나는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숙보다 못하게 우리 집을 사용해도, 나는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내가 발품 팔아 구하고, 내가 기를 쓰고 대출받아 살림을 구성해 놓은 우리 집에서 굳이 재우고 싶었다. 그 아이는 내 아이니까. 우리 부부의 아이니까.


어머님은 남편에게는 '아이와 많이 놀아 줘야지'라고 아빠 노릇을 채근하셨다. 내게는 아무 말씀도 않으셨다. 내게 '엄마로서의'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잔소리하지 않기 위해서이신지, 힘든 나를 배려한다는 목적이셨는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는 어머님도 어머님 스스로를 기만하셨을 거 같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할머니 간의 정이 돈독하고 깊은 만큼, 엄마가 끼어들 여지는 달리 주고 싶지 않아 하시는 것 같지만, 그 자리에서 '뭐 하십니까'라고 해야 할 정도로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어머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욕망일지도 몰랐다. 어머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렇게 지내도 엄마를 못 이긴다. 엄마 좋아하는 것 봐라."

분명히 어머님 말씀이다. '엄마가 최고'라는 그 말을, 정말 믿으셔서인지 모르겠지만, 기른 정이 무섭다는 말은 안 믿으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와 함께 있는 상황에서 내가 나서고 싶을 때마다 어머님이 나서셨고 내가 나설 여지가 없었다. 나는 어머님 앞에서야말로 그 아이의 엄마로서 자리 잡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님 앞에서야말로 나는 그 아이의 엄마가 아닌 것만 같았다. 어머님이 내 아이를 돌봐주시면서 '엄마가 해 줄게'라고 말하다, '아니, 할머니가...'라고 고쳐 말하신 것이 여러 번이었다.

나는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말을 아끼고 참았다. 어머님의 수고는 사실이기 때문에, 거기에 감사하는 마음도 사실이기 때문에, 더 참았다.


논리 문제를 풀 때, 완전히 참인 문장과 완전히 거짓인 문장은 판단하기가 쉽다. 난이도를 높이는 것들은 참과 거짓이 섞인 문장이다. 어머님은 나에게 난이도 높은 섞인 문장이었다. 아이를 아끼시는 마음과 나를 지지하시는 마음, 그리고 아이에게는 아빠와 더불어 최우선인 존재로 서고 싶으신 듯한.

나, 아이 아빠, 할머니가 아이를 둘러싸고 '이리 온' 하며 논 적이 있다. 아이는 아빠에게 먼저 갔다. 그 후 할머니 품으로 갔고, 내 품으로는 오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할머니와 아빠, 둘은 깔깔 웃었고 나는 가짜로 웃었다.

아이 아빠가 주말에 외출할 일이 있었다. 나는 아이와 단둘이 있을 생각에 기쁘게 '어머님, 이번 주말에는 아범이 어디를 간대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님은

"그래, 들었다, 너 혼자 애를 어떻게 보겠니? 우리 집으로 오렴. 불편하다면 내가 가서 도와줄게."

그래서 나는 아이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그때 당당하게 '제가 돌볼 거예요'라고 말하지 못했던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내 마음도 섞인 문장이었다. 참 감사와 거짓 감사, 참 싫음과 거짓 싫음, 육아에 관한 양가감정 등.


남편이 처음으로 신차를 샀다. 중고차를 8년 운행하다가 산 차이니 감회가 남다를 터였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좋은 데라도 갔다 오라고 했다. 말 꺼낸 김에 다 함께 갔다. 바다에서 바람을 쐬고 식당에 들어가 앉았다. 이날만큼은 시부모님이 편안히 즐기시라고 내가 아이를 보겠으니 정말 사양하지 마시고 식사를 하시라고 했다. 어설픈 내 모습에 영 마땅치 않으셨던가, 어머님은 숟가락을 들지 않으시고 결국 일어나서 아이를 데려가셨다.

"너 먼저 먹어라. 아이가 내 품을 편하게 여기잖니."

아이를 낳은 엄마로서, 매일 그 아이의 곁에 맴돌던 엄마로서,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그렇게 배려를 받아 제때 따뜻한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건 기쁘게 받아들여질 일이 아니었다.


남편은 결혼 전에 하던 말과 다르게, 아이를 전적으로 어머님께 맡겼다.

내가 고른 아이 간식은 아이 입에 안 들어갔다. 생후 6개월부터 먹을 수 있는 주스를, 8개월이 되어 사 주었는데도, 달다며 못 먹이게 했다. 당도의 높낮이를 따지기 전에, '단맛'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랬다. 내가 주말 아침으로 해주기 위해 사 온 오트밀은, 한 번 실패하자 '아이가 안 먹잖아'라는 이유로 내 입에만 들어왔다. 아이가 식사하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나는 초장에 제지하고 밥상머리 교육을 시작하고 싶었으나, 시댁에서는 우뚝 일어선 아이를 칭찬해 주고 박수를 쳐 주었다. 나랑 안 맞았다. 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할 때, 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위험하다는 것부터 알렸다. 그게 내 방식이다. 내가 비명을 지르고 히스테리를 부린 게 아니라, 경고성 소리를 내기 위해 내 성대를 조작적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머님께서는 이가 충격받을 수 있으니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말하라고 하셨다.

매일 시댁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나와 생각이 어긋나는 것이 있을 때마다, 남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남편은 어디에서 공이 날아와도 다 배트로 쳐낼 수 있는 타자처럼 내 의견을 상대했다.

"그래서 좋지 않아? 주영이는 편하잖아? 주영이는 몰라서 그래.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를."

어머님과 본인이 이 아이를 돌보느라 고생하는데, 너는 하는 것 없이 말만 얹는다, 그런 뜻이었다. 나는 하는 게 없으니 그 말 앞에 입 다물었다.

내가 돌보는 데에 재능이 없다고, 남편은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머님과의 육아를 거리끼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고 어설플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는데. 그는 처음부터 아기를 잘 안는 자기 자신에 자부심이 있었고 나를 면박주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실수로, 우리의 노력으로 한 아이를 기르는 경험을 함께 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가장 큰 핑계는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늦게 일을 시작한 것, 그것이 가장 큰 '여건'의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가 자라는 데에 함부로 말도 못 얹었다. 말을 얹어도 모두가 귀담아듣지 않았다. 멸균우유를 포장된 빨대로 그냥 먹여보자고 하는 사소한 제안을, 어머님이 뭐라고 거절하셨더라? 그런 포장 빨대에 찔려 입이라도 다치면 트라우마가 생겨 영 못 무는 아이가 되니까, 조금 더 자라서 물게 하자고?

내 아이는 세 돌을 앞두고도 여전히 포장 빨대를 물지 않는다. 오로지 돌 무렵부터 사용한 실리콘 빨대만 사용한다. 우유 한 잔을 컵에 따라먹지 못하고, 빨대컵에 담기지 않으면 우유를 마시지도 않는다. 그걸 볼 때마다 짜증이 난다. 이를 향한 짜증이 아니다. 지나간 그 유감스러운 순간들이 매번 떠올라서 그렇다.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에서 의견 차이가 심했다. 그러나 내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아이는 남편의 방식과 할머니의 방식대로 자랐다. 굉장히 너그럽고 관대하고 세심하고 배려가 넘치는 가풍이었다. 나는 그 가풍 속에서 내 아이가 월령에 맞는 독립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자란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배려가 아이를 오히려 무능력하게 만든다고. 마치 빨대를 물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아이가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물 줄까?' 하고 물이 나타났다. 아이는 지금도 물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정수기 앞에서 손가락을 들고 '이이잉' 한다. 그러면 어른들이 컵에 물을 담아 준다. 아이가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아이가 언어지연을 겪는 것이 이토록 잘 맞춰주는 어른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하나가 바꾸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며느리였고, 배려의 대상이지 경청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그 지점에서 결국 '한낱 며느리'구나, 하고 나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그런 가정에서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사상이다.

아이가 언어지연을 겪고, 일상생활에서 또래보다 서툰 점이 있는 것을, 남편은 그저 '기질'이라고 말했다. 내 눈에는 아이에게 성취를 요구하지 않은 채 해주기만 면서 무력한 아이가 되게 만들어 놓고 아이의 기질을 탓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었다. 당신이 뭔데 내 아이 기질을 운운하는가? 내 아이가 처음부터 못하기로 된 그릇이었던가?

내 말은 여전히 씨가 먹히지 않았다.


아이가 언어지연임을 발견하고 치료를 결정하면서, 나는 아주 외로워졌다. 언어'치료'를 보낸다는 내 결정이 유난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시어머니께서 나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 기억도 안 난다. 대체로 아이는 기다리면 다 하게 되어있다는 요지였다. 우리 아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도. 나는 아이를 기다리면서도 우리가 해 줘야 하는 행동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님의 방법과 다르다. 어머님은 당신의 방법이 틀렸다고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으셨다. 남편이야말로 더욱 그랬다. 오히려 나를 언어치료를 할 때쯤 되어서야 비로소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엄마로 여겼다.

나는 육아에 나를 배제해 놓고 언어지연 아이를 만들어 놓은 사람들을 미워했다. 그래도 참았다. 아이로 인해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 아이가 슬퍼할 이다. 아이를 위해 그런 이야기는 만들지 않아야 했다.


"언어치료비, 같이 내줄 수 있어?"

내가 물었다.

"같이 내 달라는 거야?"

남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자존심이 상했으나 돈이 부족하니 별 수 없었다.

"금을 팔아서라도 아이 치료 보낼 거야."

"그래, 내가 조금 내 줄게."

그는 첫 달을 보태 주고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뱉은 말을 굉장히 잘 지킨다는 자기 확신이 있던데, 이 말을 안 지켰다는 사실은 기억도 못하는 것 같다.

이제 와서 돈 달라는 말은 아니다.


둘째 산후조리도 얼추 끝나고 휴직으로 여유가 생겨서, 첫째의 인생에 내가 더 끼어들 여지가 생겼다. 두 돌이 지났으니 그제껏 못한 훈육을 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노련한 솜씨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나 시행착오가 있었다(아직도 아이를 훈육할 좋은 방법을 찾은 것은 아니다). 그 시행착오의 순간에 매번 어머님이 같이 계셨다. 아이 둘을 돌보는 내가 힘들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내가 힘들까 봐, 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내 곁에서 내 아이를 자꾸 감싸셨다. 미칠 노릇이었다. 어머님과 독대하면 어머님과 내가 하는 말이 같은 것 같았다. 크게 말해서 아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같았다. 그러나 어머님은 내 방법 하나하나를 좋은 말로 만류하셨다. 어머님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야근하는 날이면 어머님께서 밤 10시가 되도록 우리 집에 계시기도 했다. 첫째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가시겠다고 했다. 이유란, 아이가 할머니 떠나는 것을 보면 울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졸려서 잠이 들 때도 울었다. 어느 날 어머님더러 그냥 가시라고 가시라고, 어렵고 어렵게 보내고 난 뒤 아이와 방에 들어가 누웠다. 할머니가 떠난 아쉬움 반, 졸음 반으로 우는 아이를 달래는 동안, 창 밖에 복도 센서등이 꺼졌다 다시 켜지는 것을 보았다. 이 울음이 그칠 때까지 계실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어머님의 아이를 뺏어다가 억지로 돌보고 있는가?


저 새끼는 내 새끼인가, 어머님 새끼인가, 속으로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어머님도 말실수할 뻔한 적이 있다.

"네 아들이기 전에,......."

그 말씀을 안 참고 그대로 하셨으면 아마 내가 미련 없이 남편과 갈라설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저럴 거면 그냥 어머님, 남편 아래로 호적을 파지, 왜 내 아들로 등록은 해 놓았나 싶었다.

매정한가?

내가 저 아이를 낳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어떤 엄마가 되고 싶었는지는 나만 안다.

당연히 좋은 엄마이고 싶었다.


훈육을 시작하고 얼마 뒤, 아버님으로부터 장문의 메시지가 왔었다. 어머님의 생각과 궤를 같이하는 내용이었다.

아버님은 나더러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하셨다. 그저 늘 감사드린다고 답하긴 했다.

기분 나쁠 것 같으면 말씀을 마셔야 하는데, 굳이 하신 이유는, 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남편이시기 때문이리라.

자식을 훈육한다는 이유로 시댁으로부터 말을 들어야 한다는 사정이 기가 막혔다.

내가 나쁜 방식으로 훈육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다들 나를 유난스럽고 공격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분노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나쁜 훈육인가? 단호하고 엄한 눈을 하고 아이를 바라보는 게 나쁜 훈육인가?

손찌검을 했던가, 난폭하게 굴었던가, 신경질을 냈던가?

내야 마땅한 화를 내는 모습이 괴물 같은가?

아이에게 분노와 화, 싫어함, 미워함 같은 감정을 보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가? 그 감정도 당연히 인간의 것이고, 느낄 것인데.

그 감정을 먼저 알지 않고, '다른 사람이 싫어할 테니 그런 행동은 하지 마렴'이라는 말로 아이를 제재하는 게 가능해지는가?


남편 앞에서는 두서없이 눈물이 나고 하소연이 나왔다.

그러나 남편은,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우는 내 앞에서 천연히 식사를 마치고, 나더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여전히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하면서.

요령껏 하라는 뜻이었다.  대화를 한 날은 잠들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혼자 되뇌고. 아침이 되어

"내가 다시 이렇게 울 일이 생긴다면, 이 가정을 지키지 않아. 난 떠날 거야."

말했다.

그는 그때서야 놀랐다. 그는 내가 경솔하게 이혼을 입에 담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전히 나를 모른다.


그는 내가 첫째를 보는 동안 소외당하고, 그 소외를 당연시하는 남편의 태도에 내가 늘 실망하고 좌절해 왔음을 모르는 게다.

아주 오랫동안 참고 참다가 헤어지자고 말했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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