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나는 실패했다.
함부로 관조하려 든 오만함
본래 브런치에 작가로 들어서며 기획했던 글은 경력단절여성에 관한 것이었다. 경력단절여성 출신의 경력단절여성 사업 담당 공무원으로서 지낸 약 2년의 시간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만이 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휴직하고 글쓰기를 할 여력이 생기자마자 내가 한 짓은 그저 내 사는 게 이렇다고 한탄하는 것뿐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실패했다. 내 꿈은, 홍익인간이다. 내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 가면 좋겠다. Sia의 노래 가사처럼. ('World, I want to leave you better.') 꼭 널리 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변 반경 50센티미터만큼, 이라도. 그러나 그다지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을 쓰지 못했다. 나는 20대, 후회와 환희와 절망과 나태, 자기애가 범람하고 날뛰던 시기의 글쓰기에서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 또다시 서고 싶지 않던 그 좌표로 돌아와서, 친구 없는 티를 팍팍 내고 있다. 집 가까운 술집에서 그날의 애환에 걸맞은 소주, 맥주 혹은 소맥을 골라 마시면서 떠들고 나면 밤공기에 휘발시키고 말았을 법도 한 이야기를 굳이 활자화해서 애꿎은 데이터센터에 새겨놓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나다. 아직까지도.
어쨌거나 이 글들은 처음 이혼을 입에 올릴 정도로 갈등을 겪은 우리 부부 관계가 서서히 부식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내 소중한 육아 휴직 기간을, 아이 양육을 두고 엄마로 자리잡지 못한 내 정체성 불만과 함께 시부모님, 남편과의 티 안나는 신경전으로 소모하고, 이 글을 썼다. 여전히 사람들은 우리를 더없이 다정한 잉꼬부부로 본다. 오오, 나는 어느 제단에 나를 바칠 것인가. 아직도 바칠 것이 남아 있는지.
이 연재를 하는 동안 내 글에 진지한 관심과 좋은 조언을 주신 구독자가 계셨다. 쉽고 재기 발랄하게 써 보라고 하셨고, 나 역시 내 글에 그런 게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빠르게 반영하지 못했다. 댓글로 소통하는 기쁨과 별개로, 내가 글로 기록하는 내 상황은 내 감정에 무겁게 잠겨 있었다. 조금 쉽고 재기 발랄해지려면 나는 나 자신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아무도 뜯어말리지 못할 정도로 오로지 나만의 편이었다. 나 외에 누구의 입장도 돌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내 입장을 돌보지 않는다고 느꼈고, 그럴 때 나를 돌볼 수 있는 건 나 자신 뿐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반가웠던 구독자께서는 두어 편의 글에서 내가 조언을 바로 따르지 못함을 보고 내 글을 떠나셨다. 빠른 결단이었다. 현명하시다고 생각한다.
목질화라는 제목을 달고 시작한 것부터 패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식물의 목질화를 이루는 데 중요한 것은 바람이다. 바람에 충분히 흔들린 식물이 목질화를 겪는다고 한다. 우리 부부관계가 분명히 흔들리고 있고, 서로를 향한 관심이 무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삶이 아직 제법 남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무관심과 갈등이라는 과정을 거쳐 단단한 관계가 차차 완성되어 가리라고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참 흔들리고 있는 현재의 나 자신을 두고 '목질화하고 있는 중이야'라고 촌평하는 것은, 어쩌면 주제넘을 정도로 관조적인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모습을 '목질화하는 중이야'라고 평가한 것부터가 그랬다. 지금 내 나이테는 썩고 있다. 그게 목재에 특별한 무늬를 남길 옹이에 불과한지, 목재 전체를 망칠 정도의 부패인지, 가늠할 수 없다. 나는 곪았다. 여전히 곪고 있다.
나를 흔드는 바람의 정체는, 내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내가 예상한 바람은 '시간이 흘러 사랑이 조금 식고 서로에게 덤덤해진 사람들'이었지만 글을 쓰면서 파헤쳐보고 남편의 말을 들어보니 이 바람의 정체는 '상할 대로 상해 버린 존중'이었다. 나는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많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더 충실하게 흔들리기만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글을 써서 공개를 했음은, 내 일상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기 글렀고, 글을 던져 누구에게라도 위로받았으면 하는 심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위로는 얻지 못했고 글쓰기 기술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에 가장 필요한 피드백을 준 것은 남편이었다. 그리고 여동생이 있다. 남편은 내 글이 너무 길고 했던 말을 반복한다고 했다. 글을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교훈을 얻거나, 읽기 전에 비해 상승하거나 고양감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거나, 카타르시스가 있거나 해야 하는데, 내 글엔 그런 것이 없다고 했다. 여동생은 몇 편을 읽은 뒤에 더 구체적인 평을 들려주었다. 평소의 무게감 있는 내 문체와 어두운 내용이 너무 딱 맞아떨어져서 더욱 어둡고 읽기 싫다고 했다. 시어머니를 칭찬하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자기 비하가 섞여 있는 부분이 정말 별로였다고 했다. 그건 순수한 칭찬 같지도 않고, 특히 자기 비하가 정말 싫다고 했다. 그녀가 특히 놀라워한 것은 내 글을 남편이 전부 읽고 있으며, 이를 읽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런 것까지 쓴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치기도 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이 글을 읽다가 '이렇게 가다가는 이혼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동생의 마지막 평은 꽤 충격적이었다.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나는 나의 글쓰기 능력, 혹은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만 느꼈지 내 이야기 자체가 그 정도로 불행한 이야기라고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그 정도로 불행해 보이느냐고 물었더니 글만 보면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언니가 이렇게 써야만 속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동생은 나를 말리지 못했다. 나 역시 입을 벙긋거리다 겨우 말했다.
"통계적으로 결혼 후 5~7년 사이에 이혼을 많이 한다지. 나처럼, 아이를 키우면서 갈등을 많이 겪는 모양이지."
그 또한 오만한 관조였다.
처음의 충격이 가시고 나자, 오히려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발가락뼈를 다쳐 친정에 요양하던 참이었다. 아들과 남편은 어머님의 손길을 받고, 나와 딸아이는 친정에서 엄마의 손길을 받았다. 그 분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 해서, 나와 남편이 이룬 '우리 가족'과 양가 모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내 아들이 없는 일상을 어색해하신다. 내 친정 엄마는 내 아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어려워한다. 친정 부모님과 내 딸은 아주 사이가 좋았다. 지내면 지낼수록, 딸만 품고 친정에서 요양하는 생활이 마음에 쏙 들었다. 주말마다 남편과 아들이 친정에 왔다. 아들은 친정에 올 때마다 한바탕 울었다. 아이는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의 품에는 안기지도 않았다. 심지어 내 품에도 잘 오지 않았다.
어느덧 남편에게 더 이상 먼저 말 걸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한 명이라도 집을 비우면 늘 밤마다 통화를 하곤 했지만, 이제 그러지 않았다. 아이를 두고 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서, 필요한 만큼만 연락이 오갔다. 아들은 나를 보면 길게 울었고, 잠깐 놀다가, 다시 남편과 떠났다. 그리움도, 풀어야 할 회포도 없었다. 헤어지기 직전에야 순순해지는 아들을 잠시 품에 안으면 아들에게서는 시댁의 냄새가 났다. 어머님께서 쓰시는 세제의 냄새, 집 냄새, 밥 냄새가 어우러진 냄새였다. 나는 내가 내 집에 만들어놓은 내 냄새가 그리웠다. 건조기의 정전기, 아득바득 챙기는 방향제, 버터, 이따금 된장국. 그것들이 풍기는 나의 냄새를.
아이를 낳자마자 어머님과 남편과 아이가 행복한 가족이 된 대신 나는 한낱 자궁 제공자가 된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를 산후우울이라 의심하면서도 결국은 주저앉고 말았던 첫 출산 직후의 우울함과, 아들의 몸에서 지금껏 풍기는 시댁 냄새는 내게 일맥상통한 것이다. 우리 부부가 부모로서 주는 사랑을 능가하는, 어머님의 손주 사랑이, 언제나 우리 정수리 위에 드리워져 있다.
이제는 이혼이라는 말에, 오히려 귀가 솔깃해졌다. 그래, 이 정도로 우울하면, 이혼하는 게 차라리 낫지.
내가 꿈꾸던 세계는 나와 딸이 있는 가정 안에서 이미 완성되는 것을, 뭐 하러 남의 사람인 남편과 아들에게 목을 맨담?
친정을 떠나 집으로 돌아올 날이 다가올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일을 구해 독립한 이후 한 번도, 내가 꾸린 집으로 돌아가는 게 싫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심지어 녹물이 나오는 빌라에 살았어도 친정보다 내 집이 마음 편했었다. 나는 친정에서 오랜만에 느끼는, 떠나기 싫을 정도의 편안함과 은근한 행복감을 통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불행했는지를 깨달았다. 진심으로 내가 꾸린 가정에 돌아가기 싫어졌다.
우리의 결혼은 천 년의 절절한 사랑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남편이 나를 두고 인생을 동업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각자 연애경험도 있고, 30대를 맞이하고. 순애보나 낭만보다는 지극한 현실주의 덕분에, 오히려 영화 같은 빠른 연애와 결혼이 가능했더랬다.
사실은, 연애를 몇 번 해 보고, 나이를 먹다 보면 이성은 누구라도 상관없어진다. 동시에 누구여도 소용없어진다. 어디에 무게를 두든 한 끗 차이다. 그럴 때 선택한 결혼이 예상외로, 꽤 수월하게 굴러간다. 우리는 결혼과 인생을 두고 서로에게 협조하는 관계고, 가정의 공동 경영자다. 사랑에 관해서는, 뭐, 남편의 입을 빌리면, '천생연분이란 게 어디 있느냐.'
장기 연애를 끝내고 단기간에 결혼한 사람들이 잘 산다고 한다면, 우리 같은 종류의 부부일지도 모른다.
잘 사는 부부에 관하여, 내가 말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언젠가 그는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서 엄마나 아빠가 없어지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나도 아이들의 인생에서 사라질 생각이 없다. 특히 아들은 내가 지금껏 참아 온 이유였다. 아들과 원하던 만큼의 관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쌓이고, 가정을 깨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그가 내 아이라는 물리적 사실을 붙잡고 버텼다. 웃기는 역설이었다.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가정을 깨고 싶을 정도의 불만이 생겼다. 그래도 아이를 낳았으므로, 아이에게는 가정이 중요하니까, 가정을 지켰다.
진심으로 친정집 아래에 세 들어 살 궁리를 했다. 모든 것이 지금의 삶보다 나을 것만 같았다. 지금 집에 들어가는 비용보다 훨씬 아낄 수 있고, 지금 받는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아들과 남편은 살던 대로 살라고 하고, 나와 딸은 여기에서. 영양제를 털어먹으며 매일 1시간씩 운전하며 통근한다면 직장생활도 할 만하겠지, 싶었다.
남편과 나 사이에 침묵은 길고 흔해졌다. 부대껴 지낸 세월이 눈치를 챙겨주어서, 남편은 내 마음이 변했다는 걸 알았다. 내 마음속에 우리 가정은 이미 반토막 나 있었다.
돈에 대한 글을 썼을 때, 남편이 처음으로 나의 부추김 없이 스스로 내 글에 반응했다. 내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가 아집 없이 담백하게 진심으로 사과한 것은 처음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도 자존심 하나는 참으로 세다. 말씨름 끝에 내게 사과를 한들 '옜다'와 다름없는 '미안해'를 듣곤 했더랬다. 말끝에 '됐지?'가 붙을 것 같은 얄미운 말투. 사과를 받는 와중에도 심사를 아니꼽게 만드는 그런 사과.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사과다운 사과를 건넨다. 그의 언어에 깨끗한 미안함만이 느껴져서 나는 당황했다.
알겠다는 말 외에 하고픈 말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자꾸 눈물이 나서 베갯잇에 닦았다.
나는 말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울어야 할 일이 또 생기면 떠날 거라고. 나는 강한 사람이고, 함부로 울지 않는다고. 그런 내가 울 일이 생긴다는 건 내가 많이 버텼다는 뜻이니까, 박차고 뜰 거라고.
나는 떠나도 된다. 참을 만큼 참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의 분노와 눈물이 어느 정도 선까지 합당한 지 계속 자기 검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