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결국 집으로 왔다.
어쩔 수 없었다. 9월부터는 작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등원해야 한다. 8월 중순부터 등원하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내가 다치는 바람에 미뤄진 것이었다. 어린이집에 충분히 적응하는 것을 보고 복직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더 미루지 않고 돌아왔다.
전날인 금요일 밤, 남편이 시댁에서 저녁을 먹은 뒤 아들을 보여주려고 내게 화상통화를 걸었다. 아들은 잠시 모습을 보이다 곧 놀이를 하러 사라졌다.
"짐은 싸 뒀어?"
"아니. 생각도 하기 싫다."
남편은 별말 않다가 시댁을 벗어나서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왜 오기 싫은지 묻기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부터 이야기했다.
돈이 마른다.
어머님을 너무 자주 만난다.
집안일을 나 혼자 한다. 모두가 어지르고 나만 정리한다.
돈을 어쩔 수 없다면 나는 계속 남모르는 빈곤 속에서 겉으로 보기에 그럭저럭 안정적인 삶을 사느라 말라갈 것이다.
한 달에 책 두어 권을 사는 여유를 잃고, 만 원짜리 목걸이 한 줄에 전전긍긍하고, 취향도 사유도 장사 지낸 채 사는 삶. 재미도 없고 희망도 없다.
어머님을 자주 만나고 아이 다루는 방법에 의견이 충돌할수록, 어머님 댁 안에서 힘의 구조를 깨지 못한 채 어머님의 방식대로 모든 게 계속될수록, 내 아이는 어머님의 아이로 자랄 것이고 나는 그대로 무력감을 느낄 것이다.
인자해지지도, 냉정해지지도 못하는 모성과 낳았다는 책임감으로 억지로 살아야 하는 껍데기뿐인 엄마로서의 삶.
인내만 발휘하다 아무런 지혜도 발휘하지 못하는 죽은 삶.
집안일을 오로지 나만 하는 우리 집은 돼지우리나 다름없다. 질서 없고 정돈되지 않고 초라한 생활.
아아, 남편이 변할 것이라고 했지.
남편이 하나하나 대답했다. 돈은 어쩔 수 없고, 어머님과 만나는 것은 앞으로 막을 것이며, 집안일에 참여하겠다고.
그 말을 들어도 돌아가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정말 하나도 안 설렌다.
조그만 변화에 만족을 느끼고 감사하며 가정에 다시 충실할 수 있는 시점을 이미 지나 있었다. 나는 그 정도로 지쳤다.
매사에 감사? 때로는 그런 태도야말로 나태와 안주를 위한 변명을 위해 그럴싸한 포장이 되어 준다.
나는 나로 살고 싶어졌다. 나다운 엄마가 되고 싶어졌다. '엄마로서의 나'란 것이 누군가의 요구대로 만들어지려고 한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한다.
어떤 역할을 맡게 되어도, 그 끝은 내가 만든 나여야 한다.
친정에서 요양하면서 알게 된 것은 이것이었다. 우리 부부의 아이들은, 각자 김 가의 아이, 임 가의 아이였다. 큰아이는 외가에서 데면데면하고 힘들어했다. 친가의 방식대로 커서 외가 사람들은 아이를 대하기 불편해했다. 작은아이는 친가에서든 외가에서든 수더분하고 스스럼없어서 외가 사람들(친정 부모님, 내 형제들)이 손을 바꿔 가며 돌봐주고, 놀아주었다.
아들은 철저히 남편이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자랐고, 딸은 내가 편한 대로 길렀다.
아이들을 기르는 방식이 이분되어 있다. 나는 친구와 통화하다가 이렇게 하소연한 적이 있다.
"이렇게 자라는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라고 부르기 어려워. 너네 집 아이, 우리 집 아이이지. 우리 부부가 서로 육아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합의하고, 각자 다른 생각을, 우리끼리 서로 화학작용을 거쳐서 '우리 부부의 방식'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이 아이는 너네 부모님 방식대로, 저 아이는 우리 부모님 방식대로. 그건 우리 부부의 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가장 좋겠다고 생각한 방법이란, 바로 이 가정을 갈라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딸을 기르고, 남편은 아들을 기르도록. 남편이 아니면 우는 아들, 언제 어디에 있든 나를 찾아오는 딸. 친가에서 없으면 못 살 듯이 대하시는 아들, 친정에서 어려움 없이 돌봐줄 수 있는 딸. 아들이 이렇게 자라게 되기까지 선영향과 악영향 모두 남편과 어머님의 작품이라고 여기는 나는, 육아에 내 의견을 전혀 존중받지 못했던 나는, 아들이 굉장히 큰 번뇌였다.
번뇌를 손에 쥔 주전자에 비유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번뇌가 깊을수록 주전자는 뜨겁다.
뜨거운 주전자를 계속 손에 쥔 채 버틸수록 고통과 상처는 깊고 커져 간다.
이때는 주전자를 내려놓아야 한다.
번뇌를 내려놓으려면 아들을 향한 애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 애착이 질투심이나 독점욕이라는 탈을 쓰고 다루어지는 가정에서 나가야 한다. 그것은 타인의 인식으로 지은 감옥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파옥해야 한다.
그런 생각과 감정을 가진 채 돌아온 가정은 집이라는 틀만 남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내 마음속에 우리를 이미 쪼개놓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발이 아직 아파서 아이 둘을 보는 것이 어려웠다. 아들은 아침 일찍 시댁에 갔다. 아이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할머니와 함께하다 밤에만 집에서 잠드는 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다. 나는 작은애와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작은애 관련한 일로 보냈다. 아주 평화로웠다. 그러다 남편과 아들이 저녁에 돌아오면 나는 동태눈깔이 되었다.
남편이 저녁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식탁이 차려지면 나는 앉아 먹었다.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하기도 했고 음식을 만지느라 더러워진 작은애를 씻기기도 했다.
작은애를 씻기고 나와 보면 남편이 부엌을 거의 정리하고 큰애를 씻겼다.
아이들이 다 씻고 놀면 남편이 더러 장난감을 정리하기도 했다.
남편이 장난감을 정리하면 나는 청소기를 돌릴 힘이 났다. 동태눈깔로 지내도 할 일은 했다.
조금은 더 정돈되고 청결한 집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고 언제나 손님을 맞을 수 있을 만큼 자신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남편이 변했다고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느껴지고 그러지는 않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걸, 왜 안 해서. 나 혼자 하게 내버려 두어서. 가슴에 없어도 되는 서운함을 맺히게 하고. 내가 이 지경이 되어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