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이 사랑을 죽일 수 있음
더 설레게도 할 수 있음
만약 딸이 '결혼을 원하는 부류'의 사람으로 자란다면, 그래서 진지하게 배우자감을 고민하게 된다면, 나는 반드시 이 말을 해줄 것이다.
"살림할 줄 아는 남자를 만나라."
자취 경험은 살림을 제 손으로 어떻게든 해 보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조금 가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취 경험이 밥솥에 푸른곰팡이가 필 때까지 찬밥을 방치했다든지, 혼자 살아 보고도 화장실 청소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든지 하는 경우에서 끝났다면 절대 가점을 인정할 수 없다. 이 가점은 그러므로 질적 평가여야 한다. 혼자 살림을 꾸역 꾸역이라도 해본 사람은 살림의 위대함까지는 못 느끼더라도, 살림의 수고는 대충이라도 안다. 성년을 지난 한 사람이 살림의 수고로움과 보람을 모르고 귀찮음만 느끼다 말았다면 그 사람은 성별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철들 때까지 좀 기다려야 한다. 누구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자취를 하든, 하지 않든 그에게는 아직 더 배워야 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리고 '살림은 수고롭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살림에 감사해야 한다는 교훈을 결혼생활 내내 스스로 일깨우고 감사를 느끼며 살 수 있는 인간과 결혼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수고하고, 수고하지 못하면 감사한다. 감사하면 인사해야 한다. 미안하든, 고맙든, 표현해야 한다.
결혼은 함께 꾸리는 경제, 관계, 문화, 질서고, 세계다. 그 바탕에 살림이 있다. 살림은 하나의 시스템이다. 일상을 순조롭게 굴러가게 만드는 동력원이자, 일상으로 인해 원활히 작동하는 체계다. 가정을 꾸린다는 건 그 체계를 구성했다는 뜻이다. 당신의 동반자와 함께. 함, 께!
살림은 결혼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한 개인의 삶을 위한 활동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살림을 안다는 것은 본인을 위해 필요하다. 살림은 본인의 사회적 삶을 규정하는 방법이고 수단이다. 당신이 생존하는 방식이다. 살림은 의식주를 위해 하는 활동 전체니까.
본인이 입고 세상에 나갈 옷에 쉰내가 나지 않으려면 빨래 후 건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때로는 쉰내가 배인 옷감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식초로 옷을 헹굴 줄도 알아야 한다. 오래 입고 싶은 옷에 음식이 묻었을 때는 최대한 빨리 애벌빨래를 해서 새 옷을 살 돈을 절약할 줄 알아야 한다. 매일 셔츠를 입고 살진 않더라도 어쩌다 셔츠가 필요한 날에는 다려서 깃을 빳빳하게 하고 최대한 주름지지 않은 상태로 입는 게 상대방에게 예를 다하는 것이다(구김마저 패션으로 활용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변기는 오줌 자국이나 묽은 똥이 말라붙지 않도록, 물때가 고여 변기 속에 붉은 선이 생기지 않도록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세면대와 수챗구멍에 끼는 머리카락을 틈틈이 치워야 한다. 막히면 물이 제대로 흐르지 않고, 몸을 씻어 유기물을 머금고 있는 물이 화장실 바닥에 달라붙으면 물때나 곰팡이가 생기기 쉽다. 그러면 벌레도 서식한다. 곰팡이 이야기를 하니 멈출 수 없다. 곰팡이는 벽, 천장, 바닥, 실리콘, 스테인리스 수전, 어디에나 낄 수 있다. 방치하다 보면 곰팡이 냄새는 공기에 스며들고, 당신의 옷에 스며들고, 나가면 당신의 체취가 된다. 냄새 또한 당신을 표현하는 사회적 신호다. 내가 니치 향수를 뿌리자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냄새를 관리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최소한 곰팡이 냄새는 안 나게 노력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남을 훈계하거나 가르치려 들고 싶은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집에 곰팡이가 끊이지 않고 생겨난다. 개빡치게도.
나는 상류 살림꾼은 아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정도의 살림 개념은 가지고 있다. 나는 면 티셔츠나 속옷까지 한 장 한 장 다리는 사람은 아니다. 살림 유튜브를 볼 때마다 배우면서도 좌절한다. 그런 사람들에 비해 나는 너무 대충 산다. 나는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이불을 정리하지도 않는다. 침대는 늘 어수선하다. 침대 정리는 자기 계발 콘텐츠가 권하는 '성공을 부르는 습관' 1위다. 언젠가는 내가 이불 정리를 안 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감춰야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림에 관하여 확실히 아는 것은, 살림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계획성, 기획력, 시간관리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30분 동안 설거지를 마쳐 놓는다든지, 건조기를 돌려 놓고 어제 계획했던 장조림과 다음 끼니의 아기 이유식을 만든다든지, 아이들이 잠든 뒤 나 혼자 쌩쌩하게 깨어 화장실을 청소한다든지, 오늘은 반드시 냉장고 속 상한 채소들을 골라 버려야 한다든지 하는 것 등등. 그리고 매일 수시로 물건을 정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택배 상자를 열기 위해 가위가 필요할 때 두리번거리며 1분 이상을 허비하거나, 서로 기분이 상하는 대화를 나누게 될 수 있다.
'가위를 마지막으로 쓰고 어디다 뒀어?'
'평소 두던 곳에 뒀는데?'
'여기가 평소에 두던 곳이야?'
살림의 중요성은 이 정도로 이야기하자(사실 난 더 떠들 수 있지만). 살림은 매일 반복되는 실천이다. 살림에 소홀하다는 것은, 혼자 사는 삶이라면 그저 '우선순위'의 문제로 치부하고 눈 감을 수도 있다. 살림보다 더 급한 과제가 있을 수도 있지. 살림보다 더 몰두해야 하는 창작 활동도 있을 수 있지. 요즘 들어 직장에서 일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서, 잠만 자고 출근해야 할 수도 있지. 살림보다 더 오랜 시간을 쏟아야 하는 수험생활도 흔하지!
하지만 둘 이상이 살면서 이루는 살림이라면, 특히 결혼으로 가정을 이룬 경우라면, 이것은 함께 구성한 체계이니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 업무의 차원으로 다뤄야 한다. 이것은 동업이다. 부부가 결혼생활을 어느 정도는 비즈니스적 관점에서 다루어야 하는 부분이 있듯이. 살림도 당연히 그런 분야다. 기숙사에서 룸메이트를 만나도 그렇지 않은가! 쓰레기통을 어느 주기로, 누가 비울 것인지를 두고도 아주 크게 싸울 수 있다. 한쪽이 상대방의 수고를 쉽게 다루거나, 수고를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하면서 그 수고의 달달한 결과만 취하려고 들기 때문에 그렇게 다툴 수 있다. 결혼생활도 똑같다.
이게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을 갈라야 하는 문제인가?
살림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활동은 '치우기'다. 정리정돈이다. 도구를 쓸모에 맞춰 사용하고 제자리에 돌려놓는 동작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 도마, 칼, 그릇, 냄비, 국자를 사용해 몸과 영혼을 배불릴 음식을 만들었으면 도구들은 깨끗하게 씻거나 닦고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음식을 먹으려면 식기가 등장해야 하고 이것들 역시 쓰임을 다했으면 설거지를 당한 후 찬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책을 읽었으면 책은 책장으로 돌아가야 하고, 놀이를 했으면 장난감은 정리해서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 강박적으로 물건을 제자리에 놓으려고 애쓸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물건이 쓰임을 다하느라 어수선해진 상태를, 쓰임이 끝나고 나면 제자리로 돌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예비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만들어야 한다.' 치운다는 것은 아주 인위적인 노력이다. 살림의 수고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생활습관이다. 우리가 아이에게도 가르쳐야 하는, 거의 덕목에 가깝다.
결혼생활에서는, 살림의 어떤 활동은, 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에게 미루는 것이 되기도 한다. 다 쓴 치약이나 휴지심을 보고도 본 체 만 체 할 것인가, 보자마자 바로 새로 채워놓을 것인가. 약봉지를 찢어 아이를 챙겨 먹인 뒤 그 약봉지를 휴지통에 넣지 않는 것, 돌돌 말린 기저귀를 바로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그 앞에 발로 뻥 차거나 던져 두기만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수고를 미루는 행동이다. 나도 내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당신을 뒤따라다니며 당신이 귀찮아하는 소소한 동작수행을 대리하고 있어야 하는가? 기저귀를 쓰레기통 근처에 던져만 두었다가 한꺼번에 넣는 것은 시댁에서 어머님이 그러라고 하신 일이지 내가 우리 집에서 그러라고 한 적 없다. 우리 집에 어머님의 방식을 가져와 '내가 나중에 한꺼번에 넣으려고 그랬지'라고 당신이 말해봤자, 눈에 보이는 대로 기저귀를 치워야 하는 나는 당신이 '왜 그러는지'는 짐작할지언정 그걸 두고 보지 못하는 나를 보고도 우리 집에서 '도대체 왜' 그러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때때로 그런 잡일에도 들지 못하는 사소한 동작과제가 남아있는 바닥, 선반 위 등을 보면서 내 눈이 동태 눈깔이 되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나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잘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내가 흘린 분유 가루를 끈적해질 지경까지 닦지 못하고 내버려 두기도 하지만, 남이 저지른 것을 치울 때는 아무래도 조금은 억울해지는 날도 있는 거니까.
상대방도 그러하리라. 그 역시 살림의 수고를 겪고 있으니, 내가 저지른 것을 뒤에서 수습한 일이 어디 한두 번에 그칠까. 그도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은 있을 것이다. 이른 시간 출근을 하면서도 세탁기에 빨랫감과 세제를 넣은 뒤 시간 예약까지 걸어 두고, 정작 본인은 아침을 안 먹으면서도 아이들과 내가 먹도록 쌀을 씻어 안쳐놓고 나간다. 매주 화요일 아침,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를 출근길부터 가지고 내려가 분리수거를 하기도 한다. 미생물로 작동하는 음식물처리기 안에 퇴비가 쌓이면 그걸 덜어다 시댁에 가져다 드리는 것도 그가 하는 일이다. 기저귀와 분유가 얼마나 남았는지, 얼마나 주문할 것인지는 그가 전부 알아서 한다. 설거지를 나보다도 미루지 않는 사람이고, 설거지를 마치면 싱크대를 물로 쓸어 청소하는 습관도 나보다 먼저 익힌 사람이었다. 신혼 때는 나보다 먼저 청소도구를 사던 사람이었고, 분리수거함을 사던 사람이었고, 전선을 정리하고, 플러그에 견출지로 이름을 적어 붙이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런 전자기기와 관련한 정리는 잘하는 편이다.
나라고 그의 모든 규칙을 칼같이 지켜 주고 소중히 다루지는 않았다. 그가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은 뒤 여분의 밥이 생길 때마다 도시락용으로 밥을 모으곤 했는데, 나는 여분의 밥을 그의 도시락으로 챙겨주려 노력한 적은 별로 없었다. 그건 '그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범주화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상대방도 그렇게 범주화했기 때문에 안 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기들이 어지르고 놀다가 TV를 보고 앉아 있을 때, 그 어지른 장난감들을 치워두는 것을. 던져놓은 기저귀를 쓰레기통에 넣는 것, 청소기를 돌리는 것, 아일랜드장 위 간식과 약 따위를 정리하는 것, 드라이기 필터에 낀 먼지를 닦는 것을. 그는, 다이슨 손잡이 아랫부분을 돌려 필터를 청소해야 한다는 사실은 다이슨을 쓴 지 삼 년이 되어서 내가 닦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더랬다.
'그게 거기를 닦는 거였어?'
... 계속 오빠라고 불러야 할까?
내가 기저귀와 분유 재고 관리는 그의 몫이라 관심 가지지 않아도 되었듯이, 가스레인지 청소가 필요한지, 휘어버린 주방 수납장을 어떤 것으로 바꿔야 할지, 중고를 살지 새것을 살지, 공기청정기 필터를 언제 바꿔야 할지, 정수기 필터를 언제 청소해야 할지, 화장실을 청소해야 할지, 베란다 유리창을 닦아야 할지, 전자레인지 냄새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 등은 모두 내 몫이라는 범주화가 된 덕분에 그가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안 했을 것이다. 할 필요를 몰랐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내가 그의 세차 주기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그도 내가 집 어디를 닦든 말든 관여치 않은 것이겠지. 내가 휴직으로 집에 있고, 그는 출근하고 있으니, 내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고, 집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시간이 길고,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많아지는 거니까, 그래서 그럴 테지.
그렇기만 할까? 그가 집이라는 공간에서 수집하는 정보 중 '집안일'이라고 인식하는 크고 작은 일거리들을 취사선택하는 뇌내 판단을 할 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배려만을 척도로 모든 할 일을 선택했을까? 완벽하게 이타적인 인간이 있을 수 없고, 그런 인간이 있어서도 안 되지만 말이다, 그가 그 '완벽하게 이타적이지는 않은' 선택을 할 때, 그저 편리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것은 아닌가?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시각에 바닥에 널브러진 책과 장난감을 치우면서, 남은 체력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건조기에 남아 있는 수건을 꺼내어 개면서, 혹은 그걸 나도 꺼내지 않고 TV나 유튜브를 보다가 눈감고 잠들어 버리면서, 눈뜨고 맞이한 아침에 기름이 며칠째 눌어붙어 갈수록 끈적해져 가는 가스레인지를 바라보고 마음 어딘가가 아주 조금 찌푸려지면서, 생각한다. 내가 엄격한 기준을 가진 것은 아니지 않나. 이렇게 충분히 더러운데, 스트레스받는 것이 단지 내가 만들어 낸 번뇌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떤 날은 집을 치우는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남편과 얼싸안고 뒹굴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러나 어떤 날은 집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영 안 드는 바람에 남편과는 어떤 허튼짓도 하고 싶지 않아지기도 한다. 떡 줄 사람이 생각지도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어떤 날은 치우다 말고 삶에 현타가 와서, 나의 10대와 20대를 반추하며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어떤 날은 깊은 밤에 집을 치우다 말고 모든 것에 분노하면서 다 내쫓고 나 혼자 살고 싶다, 혹은 나 혼자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결혼한 여자들이 '자유부인' 되는 날을 그렇게 좋아하나 보다. 어떤 날은 삶에 마음이 동동 떠 버리기도 한다.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그런 생각이 모두 허튼 생각이고, 눈앞에 있는 것을 치우느라 머리가 깨끗해지기도 한다. 알 수 없다. 살자고, 사느라고 하는 게 살림인데, 하다 보니 죽일까 살릴까 싶다. 하지만 같이 하는 재미가 바로 사람 사는 재미였던 적도 있었는데. 그저 내 태도가 문제인가. 그냥 그렇게 끝날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데. 아니어야 할 것 같은데. 어쩌면 살림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지 못한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실패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결혼이고 출산이고 모두 떨떠름해진 것은 아닌지. 내가 남편을 얄미워하다가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까지 굳이 나아갈 필요는 없긴 한데, 알겠는데, 나도 완벽하지 않은 거 알고 인정하고 나도 살림 잘하는 거 아니고 우리 남편의 사회생활 피곤한 거 알고 나도 바깥에서 일해봤으니 그 고됨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싶고, 구구절절 양보하겠는데, 아 그래도 나는 도무지 이게 나만의 문제인 것 같지가 않다고.